김기석 목사님께(7)
한 때 당신은 나의 학생이었지만,
지금은 내가 당신의 학생입니다
나는 감신대학에서 4년 동안은 당신의 교수였지요. 그러나 당신이 감신대학을 졸업하고 평생 목회자의 길을 걷는 동안 나 역시 교수직을 떠나서 성경 번역에 몰두해 온 지가 벌써 서너 성상이 지났습니다. 최근 20여 년 동안은, 내가 당신의 학생이고 당신이 나의 교수라고, 나는 주저 없이 고백합니다. 현재까지 20여권이나 되는 당신의 저서를 통해서 배운 바가 크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저서들은 내가 주문한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당신이 그때그때마다 나를 생각해서 챙겨준 것도 아닌데, 마치 누군가가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을 내게 일러바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니면, 내가 당신의 책을 특별히 좋아하는 것을 아는 내 주변의 극히 소수 중에 어느 누군가가 그 책들을 내게 줄곧 보내주었습니다. 하여 나는 그 책들 속에서 당신의 육성을 들으면서, 당신이 목회자로서의 당신 잘못을 뉘우칠 때(「옹송그리며 쓰는 반성문」, 147-152쪽 특히 151쪽), 나도 그와 똑같은 나의 잘못을 뉘우쳤고, 당신이 하는 기도(병상에 누운 그의 손을 마주 잡은 채 나는 조용히 기도를 올렸습니다. ‘나의 손을 통해 주님께서 그의 손을 잡아 달라’고, 159쪽)를 엿들으며 난처한 처지에서도 어떻게 간절히 기도할 수 있는지를 배웠습니다. 또한 당신 덕분에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법을 발견하였고, 성도의 교제에서 함께 나눌 메시지도 얻곤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목사안수례를 앞둔 이에게 주는 조언(109-117쪽)은 백미입니다. 나는 그런 조언에는 늘 실패해 왔습니다. 신학을 지원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지레 겁먹도록 예레미야가 소명을 거절했던 것(예레미야 1:6; 20:7)을 상기시키면서 신학 지원을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겁박했는가 하면, 목회의 길로 들어선 둘째 아들이, 어릴 적, 암병동에서 사경을 헤맬 때는 하나님께 이 자식 제발 빨리 데려가시든지 빨리 살려주시든지 어서 결정해주시라고 기도했었지만, 그 아이가 목사 안수 받던 날은 이 아비는 이 자식이 당신을 섬기다가 거기에서 죽게 해달라고 기도했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말은 목사 안수를 받는 아들을 격려한 것도 아니고 축복한 것은 더더구나 아니고, 오히려 위협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이 목사 안수례를 앞둔 후배에게 해준 격려의 말들을 읽으면서 내가 얼마나 다혈질이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구도자의 자세를 가지라고 한 것, 묵상과 기도를 위한 시간의 지성소를 만들라고 한 것, 파당을 짓지 말라는 것, 설교 언어에서 매너리즘을 피하라고 한 것 등은 그렇게 살아온 선배가 아니고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조언이 아니지요.
이번에도 독자들은 당신의 글을 탐독하면서 당신이 인용한 여러 철학자(사상가, 하이데거 외 13인), 신학자와 교회지도자(디트리히 본회퍼 외 10인), 시인(강은교 외 국내 시인들 32인, 칼릴 지브란 외 외국 시인들 10인) , 여러 분야 작가(법인 외 한국작가들 10인, 니코스 카잔차키스 외 외국 작가들 22인), 화가(렘브란트 외 10인), 오르겔 마이스터, 피아니스트, 사진작가, 영화감독 작곡가, 가수 수녀 등 각 분야 전문가(홍성훈 외 7인)를 만나서, 그들의 창작 세계가 주는 감동을 전달 받기도 합니다. 별도로 당신이 “아름다운 영혼의 성좌”(이용도, 루쉰, 토리, 김약연, 강순명, 마더 테레사, 톨스토이, 토마스 아퀴나스, 최홍준, 이세종, 토마스 머튼, 함석헌, 디트리히 본회퍼, 마하트마 간디, 원경선, 가가와 도요히코, 우찌무라 간조, 김교신, 김구, 전우익, 로제 수사, 이승훈, 앨버트 슈바이처, 이현필, 프란체스코, 이찬갑, 권정생, 윤동주, 유누스, 문익환, 안창호 등 245쪽)라고 일컫는 이들은, 당신의 신앙과 지성의 원천이기 이전에, 당신의 책을 좋아하는 많은 독자들에게도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도록 이끌어준 이들이고, 생명의 빛을 반사한 별들이지요.
당신이 인용한 이들을 보다가 우연히 당신이 읽는 도서 목록을 정리해 볼 수 있었던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나라 안팎 어느 곳을 방문하든지 늘 그곳 역사와 관련된 인물을 찾는 당신에게서 우리는 우리에게 희망을 가지게 한 이들을 만나는 것도 은총입니다(예를 들면, 통영 방문기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에서는 유치환, 백석, 김춘수, 김상옥, 박경리, 윤이상, 전혁림, 이중섭).
이뿐만 아니라 책에서 당신이 조형한 아포리즘만 거두어도 결실이 풍요롭습니다. 몇 가지 예만 들어봅니다. 문맥을 떠나서도 우리에게 어떤 영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생명은 스러져도 이야기는 죽지 않는 법, 이야기를 불멸로 만드는 것은 살아있는 자의 기억에의 의지다.”(90쪽), “척박한 환경을 자기 삶으로 수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기 내면에 꽃이 피어나는 법이다.”(97쪽), “시혜자의 자리에 서는 순간 선한 뜻은 공적 쌓기로 전락하고 만다.”(100쪽), “칭찬을 구하는 이들은 실망을 추수하게 마련이다.”(100쪽), “희망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서 숨은 불씨를 찾는 것이다.”(108쪽), “이익의 원리가 의의 원리 혹은 신앙의 원리를 대체할 때 거룩함은 가뭇없이 스러지게 마련이다.”(126쪽),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오실 분의 삶을 이 땅에서 재현하며 사는 것이다.”(164쪽), “자기 성찰로 이어지지 않는 신앙 고백은 허망한 것이다.”(216쪽), “신앙은 ‘떠남’과 ‘따름’ 사이에서 형성된다.”(337), “과도한 욕망의 길 끝에는 수치가 있다.”(355쪽)
시절을 적는다, 세상을 읽는다
당신의 글을 읽다가 매 챕터마다 당신이 절기 코드를 적어 넣은 것을 발견하고, 재미있었습니다. 내 마음대로 당신의 글을 <겨울 편>(14-82쪽), <봄 편>(83-189쪽), <여름 편>(190-264쪽), <겨울 편>(265-383쪽), 이렇게 넷으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겨울 편>에서는 “소한에서 대한으로 넘어가는 이즈음”, “대한이 지났는데도”, “소한 추위가 지나더니”, “입춘이 지난 후”와 같은 언급을 봅니다. 당신이 당신의 글을 우리의 24절기에 맞추어 정리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도 합니다. 그러나 <봄 편>을 보면, “접동새 우는 4월에는 채 피어보지도 못한 채 스러져간 세월호 참사자들이 떠오르고, 5월이면 1980년 광주에서 죽어간 넋들을 떠올리게 되고, 6월에는 이 한반도를 피로 물들인 전쟁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132쪽)고 하여 땅의 사건을 읽고 있고, <여름 편>에서는 다시 “장마철이 되어서인지…”, “소서가 코앞이어서”, “이제 본격적 무더위가…” “여름의 끝자락” 같은 코드를 숨겨 비와 바람과 태양의 열기를 읽고 있습니다. <가을 편>에도 “백로가 지나서인지”, “이 가을 날, 저 청명한 가을 하늘처럼”, “추석연휴 기간 중에…”, “한로를 앞둔 절기여서…” 등을 언급하면서 하늘과 땅의 변화를 읽습니다. 어쨌든 당신의 글이 <겨울, 봄, 여름, 가을> 이렇게 네 계절로 뚜렷하게 구분되어 골고루 편집이 되어 있는 것이 재미있군요. 대림절부터 시작되는 교회력을 따른 것 같기도 하고… 잊혀가는 24절기를 당신에게서 다시 찾는다는 것이 소중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당신이 의식했든 안 했든 독자들은, 기후와 우리의 삶 우리의 생각이 참으로 밀접하다는 것도 당신의 글에서 읽을 수 있었으니까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이 공간 위의 삶과 역사를 관찰하면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하늘과 시절을 읽는 당신이 이번에는 돋보였습니다.
얼마 전, 내가 속한 독서회에서 조지 기싱의 《헨리 라이크로프트 수상록》을 읽는 적이 있습니다. 조지 기싱이야 영문학계에서는 워낙 유명한 인물이니까 그의 여러 저서 중 하나를 읽나보다 했지만 책 제목에 나오는 ‘헨리 라이크로프트’라는 이름은 처음 듣는 이름이어서 왜 우리가 그의 수상록을 읽어야 하나, 왜 또 그의 수상록을 조지 기싱이 써주었나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책을 펴보니, 목차가 <봄, 여름, 가을, 겨울>입니다. 그의 유고 뭉치를 읽으면서 기싱은 적습니다. “나는 라이크로프트가 하늘의 상태와 계절에 순환에 언제나 많은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 작은 책을 계절에 따라 네 개의 장(章)으로 나누기로 마음먹었다”(13쪽). 읽다가 보니 이 책은 조지 기싱이 죽기 전에 자기 이야기를 남 이야기하듯, 가상의 인물, 발음도 하기 힘든, 헨리 라이크로프트를 내세워 하고 있습니다. 자서전에 소설적 허구를 넣자니 그렇고 안 넣자니 무엇이 빠진 것 같아 아쉽고,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친구의 수상록 써주기 형식을 취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는 이미 당신의 《길은 사람에게로 향한다》에서도 당신이 “하늘의 상태와 계절의 순환에 언제나 많은 영향을 받고 있음”을 이번에 다시 읽어 보면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하늘과 땅을 함께 읽으며 2016년 봄과 사순절과 부활절을 함께 보낸 우리에게 준 메시지, 따로 인용하여 우리의 믿음을 성찰하고 싶습니다.
엄벙덤벙 살다보니 벌써 사순절 순례여정을 마감하고 부활절을 맞이하게 되네요. 세상에 가득 차 있는 고난과 슬픔과 연약함을 부둥켜안음으로 더 깊은 세계를 지행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광화문에서 삭발식을 거행하는 것을 보며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죽은 자들의 억울함을 신원해주는 것이 산 자의 의무일진대 그들은 그 길조차 막혀 있어 피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자기만족에 겨운 사람들은 그들의 존재를 거추장스럽게 여길 뿐만 아니라, 그들을 모욕하는 일에도 주저함이 없습니다(103쪽).
「길을 잃으면 어때」라고 하는 마지막 장이, 이성복이 말하는 ‘장난끼’(285쪽)와는 얼마만큼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자못 심각하게 끝날 줄 알았는데, 긴장했던 (당신은 늘 독자를 긴장시키죠.) 우리 독자들을 크게 웃게 했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무장해제 하듯 하는 말을 하는 것은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뿐인가요? “길을 잃지 않았더라면 만날 수 없었던 인연을 생각하면 길 잃음이야말로 은총이 유입되는 통로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381쪽). 이 말에서 우리는 큰 위로를 받고 동시에 또 꺼지지 않는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토박이말을 발굴하는 재미
당신의 최근 저서들을 읽을 때마다 나의 일차적 관심은,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당신이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보다는 당신이 활용하는 우리 토박이말들을 정리하고 익히는 것입니다. 거듭 죄송합니다. 이것이 저자의 저술 목적이 아닌 줄 알지만, 아마 최근의 당신의 저서들, 《아슬아슬한 희망》, 《말씀의 빛 속을 거닐다》, 《광야에서 길을 묻다》 등을 읽으면서부터 생긴 내 버릇인 것 같습니다. 이번 책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고요. 이번에도 또 어떤 아름다운 토박이말이 이 책에서 활용되었는가 하는 것을 먼저 관찰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조사하면 더 많겠지만 책을 절반까지 읽으면서 내가 찾아낸 토박이말 활용의 예는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이미 아는 것은 빼놓고 아직 처음 본 듯한 것들만 적어 봅니다.
“시난고난 애끓이지는 않을 겁니다”(18쪽), “마음을 도스르지 않으면”(26쪽), “자꾸 틀리게 부른다고 지청구를 듣곤 했습니다.”(33쪽), “신산스러운 삶의 경험이 없었다면”(36쪽), “요즘은 무지근한 어깨 통증 때문에”(49쪽), “오늘도 희떠운 소리가 많았습니다.”(59쪽), “나뭇잎은 이미 오가리 들어 있고”(65쪽), “선들어진 발걸음으로 걷는 젊은이들”(67쪽), “어른들의 모습도 오련하게 떠오릅니다.”(69쪽), “그 소리를 따라 무람없이 걷다보면”(73쪽), “진동한동 다니느라 거칠어졌던 호흡이 가지런해지고”(77쪽), “특별한 장식이 없기에 그 공간은 오히려 깔밋하게 보였습니다.”(79쪽), “나는 그분의 느르심을 흔감하게 경험하였습니다.”(79쪽), “울가망하던 마음이 조금은 거늑해졌습니다.”(79쪽), “단정하고 뜸숙한 글씨는”(80쪽), “마당가의 살피꽃밭을 살피게 됩니다.”(83쪽), “앙버티던 그때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90쪽), “엄부렁한 내 삶의 실상을”(92쪽), “여전히 여줄가리에나 집착할 뿐 깊은 곳에 당도하지 못한 채 어뜩비뜩 걷고 있는 내가”(92쪽), “서리 내린 밭에 남아 있는 희아리”(93쪽), “움씨를 뿌리는 마음”(95쪽), “아무리 겨울의 뒤끝이 무작스럽다고는 해도”(125쪽), “이익의 원리가 의의 원리 혹은 신앙의 원리를 대체할 때 거룩함은 가뭇없이 스러지게 마련입니다.”(126쪽),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너름새가 절로 드러난다.”(139쪽), “무작스런 말본새와 태도로 남의 속을 건드리는 이들”(139쪽), “저는 목사님을 뒤흔들었던 혼돈을 아령칙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140쪽), “옹송그리며 쓰는 반성문”(147쪽), “툽상스러운 듯하나 씩씩하기 이를 데 없는”(148쪽), “그 동안 현실 주변을 베돌기만 한”(148)쪽, “무작스럽게 쇄락의 방향으로 나를 잡아채는”(152쪽), “내 정신노동이 힘겨웠노라 언거번거 말할 수 없습니다.”(158쪽) “더덜뭇한 성격 탓에 삶의 비애만 가중되고(162쪽), 불쾌한 일들로 인해 오갈든 마음을 미소로 어루만지십시오.”(165쪽), “요셉의 눈길은 지며리 예수를 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172쪽) 등등.
언젠가 한 번 내게 말해준 적이 있지요? 당신도 이런 토박이말을 만나면 어느 경우에 어떻게 쓰는 말인지 충분히 알아서 예문들을 많이 만들어서 사용해 보고, 그래서 어색함이 없을 때 자신의 글에 활용한다고…. 내가 아는 문인 중에 시나 수필 전문을 토박이말로만 쓰는 이가 있는데, 그것은 번역본이 따로 있어야 읽겠던데, 당신의 경우는 독자들이 토박이말에 흥미를 가지고 다가가며 배워보겠다는 끌림을 주니, 대단히 교육적인 면이 있습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토박이말 사전(<재미있고 순우리말 사전>, <아름다운 우리말 이름 및 단어 모음>)에도 안 나오는 낱말들은 당신의 설명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책으로 엮어 보낸 편지를 읽다보니, 이처럼 여러 좋은 대목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또 한 번 기꺼이 당신의 학생이 되어 배울 수 있으니 즐겁습니다. 같은 시공간에 이처럼 배움을 나누는 당신과 함께 있다는 것은 그리하여 내게 즐거움입니다.
올 여름이 뜨거운 만큼 다가오는 또 다른 계절은 그 아니 좋지 않겠습니까? 부디 좋은 시간 속에서 함께 만납시다. 만나 즐거울 때까지 안녕하기를.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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