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께(1)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을까요?


목사님, 송구스런 고백부터 해야겠습니다. 목사님이 쓴 편지들을 묶은 책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를 받아 들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내게 쓰신 편지도 있을까?’ 하는 거였습니다. 물론 저도 이게 터무니없는 생각인 걸 압니다. 왜 모르겠습니까? 제가 목사님을 알게 된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고 제게 편지를 쓸 만큼 친한 사이도 아니란 걸 말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혹시…’ 하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우습지요? 개인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담은 편지란 걸 마지막으로 쓴 게 언젠지도 기억 못하는 주제에, 게다가 목사님에게 편지 한 줄 쓴 적도 없는 처지에 목사님에게 편지 받을 기대를 했다는 게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책을 읽는 중에 ‘혹시 이게 내게 쓰신 편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고 다 읽고 나서는 ‘흠, 역시 내게 쓰신 건 없네…’ 하면서 서운해 했습니다(^^).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송구스런 고백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동안 전 한종호 목사님에게 목사님 책을 여러 권 받았습니다. 그 중에는 목사님이 직접 서명해주신 책도 있고요. 그런데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정독한 건 이 책이 처음입니다. 《아슬아슬한 희망》은 중간까지 읽다가 일에 쫓겨 중단한 뒤, 마저 읽지 못했고 《광야에서 길을 묻다》는 제가 필요한 부분만 찾아 읽었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정독한 책은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가 유일합니다.


목사님은 이 편지들을 ‘세속적 우상과의 싸움에서, 회한과 절망 속에서, 독사의 혀 같이 징그러운 바람 사이에서’ 희망을 묻는 사람들에게 보낸다 하셨습니다. ‘세속적 우상과의 싸움’이나 ‘회한과 절망’이란 말에도 눈길이 갔지만 그보다는 ‘독사의 혀 같이 징그러운 바람 사이에서’라는 말에 제 가슴이 서늘해졌습니다. 제가 요즘 들어 자주 하는 생각과 맞닿아 있어서입니다. 저도 언제부턴지 세상살이가 독사처럼 교활한 그 무엇인가와의 싸움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TV 화면에 자주 등장하는 어떤 사람, 엄청난 권력을 갖고 있지만 어쩜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두뇌에 빈 공간이 많아 보이는 그이의 눈에서 사악한 독사에게서나 봄직한 눈빛을 보곤 했습니다. 두뇌의 빈 공간을 사악한 기운이 차지하고 있겠다는 생각에 그 두뇌를 MRI라도 찍어보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이를 볼 때마다 섬뜩한 느낌을 받는 사람이 아마 저만은 아닐 겁니다.


비수처럼 가슴에 박힌 문장


저는 오랫동안 사탄이니 악령이니 귀신이니 하는 것들의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어떻게 목사가 성서에서 엄연히 있다고 말하는 걸 안 믿을 수 있나…’ 하며 혀를 차겠지요. 그렇다 해도 할 수 없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걸 억지로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입니다.


제가 공부하는 구약성서에는 사탄이니 악령이니 귀신이니 하는 것들이 전혀 등장하지 않거나 등장하더라도 극히 예외적입니다. 예컨대 ‘악령’은 사울 이야기에 등장하긴 하지만 지나가듯 언급될 뿐입니다. 사울이 악령에 의해 괴로워했다는 대목이 바로 그겁니다. 또한 ‘사탄’은 구약성서 몇 군데에 등장하지만 신약성서의 그것과는 정체성과 역할이 다릅니다. 구약성서에서는 예외 없이 ‘사탄’이란 명사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우리말에서나 히브리어에서나 고유명사에 관사를 붙이는 경우는 없으니 이 사탄은 보통명사입니다. 그가 했던 역할도 신약성서에서의 그것과 다릅니다. 구약성서에서 사탄은 하느님에게서 받은 명령을 수행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면 욥기에서 사탄이 하느님의 허락을 받아 욥을 괴롭히는 일 같은 것 말입니다. 욥기의 사탄은 하느님이 정한 테두리를 벗어나서 자기 맘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신약성서의 사탄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심지어 하느님과 대적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니 이 둘을 어찌 같다고 하겠습니까? 이름만 같지(정관사가 붙어 있다는 점에선 그것도 아니지만) 전혀 별개의 존재입니다. 구약성서시대 사람들과 신약성서시대 사람들은 사탄을 전혀 다른 존재로 인식했던 겁니다. 사정이 이렇다면 신약성서시대로부터 2천 년이 지난 오늘날도 사탄에 대해 그때와 달리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렸을 때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인지 2학년 때 인지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교회 청년부에서 어느 주일 오후, 탁명환 목사님(이미 여러 해 전에 고인이 되셨지요.)을 초청해서 특강을 열었습니다. 탁명환 목사님이라면 이단종파 연구 전문가가 아니십니까? 우리 중고등부 전도사님은 주일 오후 성경공부 대신 학생들을 그 특강에 참석하도록 하셨습니다. 전 지금도 그때 받은 충격을 생각하면 소름이 확 올라옵니다. 그날 탁 목사님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수집했다는 귀신의 음성을 들려줬습니다. 오래 전 일이라 구체적인 내용까진 기억나지 않지만 기괴한 음성으로 탁 목사님에게 마구 욕을 퍼부었다는 건 기억납니다. 그 후로 저는 한동안 밤에 변소 가길 두려워했었지요. 저는 지금도 그 음성의 정체가 궁금합니다. 정말 귀신의 목소리였을까요? 무척 기괴하고 섬뜩한 목소리였습니다. 뭐, 세상에 제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한둘이겠습니까? 이것도 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해 남이 이런 얘기를 했다면 저는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겁니다. 그 이후로 성서를 공부하면서 알게 된 지식과 깨달음 덕분에 그때 일은 한때의 기괴한 경험쯤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쓸데없는 얘기가 길어졌네요. 좌우간 저는 목사지만 사탄이니 악령이니 귀신이니 하는 것들의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들의 존재를 믿는 건 그 시대 사람들의 세계관 속에서나 가능하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의심의 계기는 성서가 서술하는 바를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도 아니고 새롭게 귀신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최근 몇 년 동안 고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하게 됐습니다. 권력의 최고위층에 앉아 있는 그 사람 눈빛을 보면서 하게 된 생각입니다. 그 사람이 공식, 비공식적으로 내뱉는 말들을 들으면서 갖게 된 느낌입니다. 그 눈빛과 입술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저는 뭔지 모를 악한 영의 기운을 느낍니다. 비단 권력자들뿐이 아닙니다.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의 언행에서도 가끔 악령의 숨소리를 듣습니다. 단식하는 세월호 가족들 앞에서 피자를 쌓아놓고 ‘폭소’를 터뜨리며 ‘폭식’하는 사람들의 초점 잃은 눈에서도 저는 악령의 그림자를 봤습니다. 목사님 책 표지에 쓰인 ‘독사의 혀 같이 징그러운 바람 사이에서’라는 문장이 비수처럼 제 가슴에 박힌 건 그래서였습니다.



악을 행할 때 그들의 영혼은 어떤 상태일까요?


이런 때에 목사님은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을 만나셨군요. 가녀린 희망의 끈이라고 잡으려 애태우는 사람들과 조우하셨군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간절한 심정으로 목사님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차마 한숨만 쉴 수 없어서 이 편지들을 쓰신 거네요. 편지들을 읽다가 그 심정의 아주 작은 부분이나마 같이 하려는 마음으로 저도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워낙 다양한 사정과 상황 속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셨으니 비슷한 주제별로 묶기가 어려웠겠다는 생각입니다. 애초에 그럴 의도가 없어 보이기도 하고요. ‘티쿤 올람-세상을 고치다’ ‘칼로카가티아-고귀함’ ‘이디오테스-사사로움’ ‘호모 비아토르-길 위의 사람’ ‘아케다-존귀함’ ‘베스퍼스-마음의 길’ 등 여섯 장으로 묶여 있지만 장의 구분에 큰 의미가 있다고 보이지는 않습니다. 저도 그 순서를 따르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읽다가 생각하느라고 읽기를 중단하기도 했고 마음이 머무는 곳에서 한동안 머물러 있기도 했습니다. 지난 7~8년 ‘독사의 혀 같이 징그러운 바람 사이에서’ 살아남느라고 제 영혼도 참 강퍅해졌습니다. 저만 그런 건 아닐 겁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편지 덕분에 강퍅한 내 영혼이 살짝 온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뭐랄까, 아무리 그래도 세상은 희망을 갖고 살아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제 영혼이 상당히 맑아진 느낌입니다.


목사님의 편지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약자를 바라보는 목사님의 따뜻한 시선이었습니다. 어쩜 그렇게 조용하면서도 따뜻하고, 깊은 마음이 느껴지면서도 부담스럽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물리적인 거리를 없애버릴 수 있을까요? 목사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게 만드는 따뜻함이 글에서 짙게 묻어난다고 느끼는 사람이 저만은 아닐 겁니다. 지금부터 2천 년 전에도 같은 시선으로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바라본 분이 계셨지요. 그분의 시선이 얼마나 따뜻했으면 당시 체제에서 내몰려 희망 없이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아가던 사람들이 얼굴에 미소를 되찾았고 또 결국 무릎 세워 일어섰겠습니까. 또한 오늘날 그분을 주님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도 ‘기독교(교회)는 싫지만 예수는 좋다’고 말들 하겠습니까?


목사님이 인용한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에 나오는, “이상한 존재는 많지만, 인간보다 더 이상한 존재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데 이 ‘이상한 존재’인 사람에게 반복되는 자기 성찰에서 공감 능력이 확장되고 그래서 믿음이 깊어지는 더 ‘이상한’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까? 저의 바람은 이 ‘더 이상한 일’을 하는 사람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그 어떤 존재보다 ‘이상한’ 존재인 인간이 끊임없이 스스로를 성찰하고 공감능력을 확대해서 서로에 대한 신뢰를 더욱 돈독히 하는 ‘더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걸 더 자주 경험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거든요. 그런데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이와는 차이가 큰 것 같아 보통 마음이 무거운 게 아닙니다. 제가 고국의 현실과 조금은 떨어져 살기에 이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인터넷이 발달했고 SNS가 대세인 세상이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리적인 거리가 없어지진 않으니 말입니다.


저는 좋은 세상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욕하면서 배운다’는 격언이 옳음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어 솔직히 걱정스럽습니다. 이게 공연한 걱정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는 지금 어쩔 수 없이 악한 세력과 싸워야 합니다. 싸움은 이기는 것보다 안 하는 게 더 좋다곤 하지만 어차피 벌어진 싸움이고 게다가 우리가 시작한 싸움도 아니니 피할 수는 없겠습니다. 이 싸움을 끝내는 길은 이기든지 지든지, 둘 중 하나일 텐데 져서는 안 되는 싸움이니 이기긴 해야겠지요. 물론 상대방도 이기려 하겠죠. 이기기 위해서 온갖 수단과 무기를 다 동원할 테고요. 그 중엔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수단과 무기들도 있습니다. 싸움이 격렬해질수록 그런 무기들을 쓰게 마련입니다. 그러다 보니 거기 대응해야 하는 우리도 그와 같거나 비슷한 무기를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악에는 악으로 대응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하는데 워낙 싸움이 격렬해서 그런지, 아니면 ‘독사의 혀 같이 징그러운 바람 사이에서’ 너무 오랫동안 싸워서 그런지 상대방의 악에 우리도 악으로 대응하는 데 망설임이 없어 보입니다.



작년인가에 일베 사람들이 광화문에서 단식하는 세월호 가족들 앞에서 피자를 쌓아놓고 이른바 ‘폭식투쟁’을 벌이는 걸 기사와 동영상으로 봤습니다. 말할 수 없이 참담한 심정이었지요. 아,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나… 왜 세상이 이 지경까지 됐나… 세상이 어쩌다 이렇게 후안무치한가… 태평양 건너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저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들의 행위에서 뭔지 모를 두려움 같은 걸 봤습니다. 맞습니다. 그건 분명 두려움이었습니다. 그게 뭘까, 궁금했습니다. 그들의 모습에서 왜 두려움이 보이지? 그들이 두려워할 게 뭐가 있다고? 정권이 든든하게 뒤를 봐주는데 말입니다.


처음에는 세월호 가족들이나 그들을 후원하는 사람들에게 혹시 당할지도 모를 폭력을 두려워하는 거라고 짐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집중해서 여러 번 봤습니다. 그들에겐 두려움을 감추려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고통을 겪는 사람들과 연대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그 반대편에 서 있다는 데서 오는 불안과 두려움 같은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단식하는 사람들 앞에서 폭식이라는 폭력을 행하고는 있지만 그들의 영혼은 깊은 곳에서 요동치고 있고 바로 그것이 감추어진 불안과 두려움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말입니다. 제가 이 얘기를 작은 모임에서 했는데 참석자들은 그저 웃더군요. 저의 이런 생각에 동의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저는 그 동안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 대해 별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저 악하다고만 여겼을 뿐 그들 행위의 구체적인 동기나 이유에 대해서, 그들의 영혼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겁니다. 혹시 그들이 악을 행하는 데는 우리가 모르는 이유나 동기가 있는 게 아닐까? 악을 행할 때 그들의 영혼은 어떤 상태일까? 그들도 악을 행할 때나 그 계획을 세울 때 동요하고 불안하고 두려울까? 저는 그러리라고 짐작합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그들도 사람인데… 악한 세력에 사로잡혀서 그의 수족 노릇을 하곤 있지만 그들도 사람인데… 하느님의 형상을 그 안에 품고 있는 사람인데 말입니다.


저는 우리가 악한 세력과 싸우면서 알게 모르게 그가 쓰는 무기를 사용하는 법을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욕하면서 배운 것이지요.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강퍅해진 것은 우리가 그들의 무기들을 썼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저는 지우지 못합니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만 무관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으로써 악을 이겼어야 하는데 자주 악으로 악을 이기려 했다는 거죠. 그 때문에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포악해진 게 아닌가 싶어 마음이 무겁습니다.


저는 목사님이 폭식하는 광경을 어떻게 보셨는지, 거기서 뭘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방금 제 얘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가능하면 직접 뵙고 얘길 나누고 싶습니다. 조만간 고국을 방문하게 될 것 같은데 그때 만나 뵐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아참, 지난번에 목사님과 김근수 선생님과 더불어 가졌던 ‘잡담회’ 감사했습니다. 건강도 좋지 않으신데 시간 내주셔서 더욱 감사했습니다.


연일 한국의 날씨가 무덥다고 하네요. 제가 사는 나성의 여름 기온이 그동안은 서울보다 더 높았는데 올해는 그 반대네요. 습도까지 감안하면 얼마나 힘드실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건강 지키시기를 멀리서나마 기원합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하느님 몸 보기 만지기 느끼기 》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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