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웅의 광복 70주년 역사 키워드 70(6)
임시정부 돌아왔지만 ‘개인 자격’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충칭에서 일제의 패망을 내다보면서 좌우합작을 이루고 광복군을 창설하여 본토진격 등을 준비하였다. 1919년 3ㆍ1혁명을 계기로 4월 13일 상하이에서 출범한 임시정부는 27년 동안 중국 관내를 돌아다니면서 일제와 싸운 한민족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기관이었다.
임시정부는 1941년 11월 28일 건국 강령을 제정하여 해방 후 건설할 민족 국가의 성격과 강령을 마련하고, 12월 9일에는 일본에 선전을 포고하는 한편 1944년 4월 약헌(헌법)을 개정하여 부주석제를 신설, 김규식을 영입하고 민족 혁명당 등과 통합하여 좌우합작 정부를 출범시켰다.
임시정부는 또 국무위원 장건상을 연안에 특사로 파견하여 김두봉을 비롯한 독립동맹 간부들을 만나, 충칭에 모여 통합 문제를 협의키로 하였다. 그러나 시국이 급진전하면서 김두봉의 충칭행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것이 성사되었으면 해방 후 통일 과업을 논의하는 데도 큰 기여가 될 수 있었는데, 안타까운 일이 되었다.
임시정부는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듣고〈임시정부의 당면 정책〉4가지를 제시했다.
1. 임시정부는, 최소기간 내에 입국할 것
2. 미ㆍ소ㆍ영 등 우방과 제휴하고 연합국 헌장의 준수
3. 국내에 건립될 정식 정권은 반드시 독립국가ㆍ민주정부ㆍ균등사회를 원칙으로,
4.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와 매국적 처단
김구 주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은 11월 5일 장개석 정부가 내준 비행기를 타고 5시간 만에 임시정부가 출범했던 상하이로 돌아왔다. 그러나 미국이 보내주기로 한 비행기는 상하이에 머문 지 18일 만인 11월 23일에야 도착했다. 이날 김구 등 1진 15명은 미군 C-47 중형 수송기편으로 3시간 만에 김포 공항에 도착 환국하였다. 그나마 2진은 일주일 후 목포 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국내에는 임시정부 환영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었으나 미군정측은 이를 알리지 않아 공항에는 환영객 하나 없었다.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개인자격으로 귀국케 하는 등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10월 16일 미국 태평양 방면 육군총사령관 맥아더가 주선한 비행기를 타고 도쿄를 경유해 서울에 도착했다. 미 육군 남조선 주둔군사령관으로 임명된 존 하지 중장이 이승만이 일본에 도쿄에 도착했을 때 그를 만나려 일본까지 가서 맥아더와 3인 회담을 가진데 이어 대대적인 귀국 환영 대회를 연 것과는 크게 대조되었다.
미국은 투철한 민족주의자인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보다 친미성향이 강한 이승만을 처음부터 점찍고 차별대우를 하였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환영 준비 위원회에서 마련한 경교장과 한미호텔에 머물면서 해방정국에 대처하였다. 12월 19일 대규모적인 임시정부 개선 환영식이 열렸다. 미군정은 냉대했지만 국민은 임정요인들을 뜨겁게 환영했다. 식장에는 조선 음악가 협회가 제정한〈임시정부 환영가〉가 우렁차게 울려퍼졌다.
임시정부 환영가
1.
원수를 물리치고
맹군이 왔건만은
우리의 오직 한 길
아직도 멀었던가
국토가 반쪽이 나고
정당이 서로 분분
통일없인 독립없다
통일만세 통일만만세
2.
30년 혁명투사
유일의 임시정부
그들이 돌아오니
인민이 맞이하여
인제는 바른 키를
돌리자 자주독립
독립없인 해방 없다
통일만세 통일만만세.
환국한 임시정부는 해방 정국의 주역이 되지 못하였다. 12월 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5년 신탁통치를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임정 요인들은 반탁운동에 앞장서고, 미군정과 친일세력으로부터 사사건건 견제를 받았다. 참다못한 김구 주석은 12월 31일 내무장관 신익희에게「국자(國字)」제1호ㆍ2호의 임시정부 포고문을 발령케 했다. 미군정과 정면 대치하는 결단이었다.
국자 제1호
1. 현재 전국 행정청 소속의 경찰 기구 한국인 직원은 전부 임시정부 지휘 하에 예속케 함.
2. 탁치 반대의 시위운동은 계통적ㆍ질서적으로 할 것.
3. 돌격 행위와 파괴 행위를 절대 금함.
4. 국민의 최저생활에 필요한 식량ㆍ연료ㆍ수도ㆍ전기ㆍ교통ㆍ금융ㆍ의료기관 등의 확보
운영에 대한 방해를 금함.
5. 불량상인들의 폭리 매점 등은 엄중 취제함.
하지는 이와 같은 임시정부의 처사를 군정에 대한 쿠데타라고 비판하면서 김구를 구속하여 인천 감옥에 수감했다가 중국으로 추방할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한국 민중의 대대적인 저항을 불러올 것이라는 주변의 만류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임시정부(김구)와 미군정은 돌이키기 어려운 관계가 되었다. 해방 정국은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좌ㆍ우 세력의 찬반투쟁으로 갈리고 통일정부 수립과 친일파 청산 등 민족적인 과제는 실종되었다. 임시정부는 미군정이 비록 실체로 인정하지는 않았으나 정치적으로는 가장 활발하게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한 세대에 걸쳐 피어린 투쟁으로 독립된 나라가 또 다시 외국의 신탁통치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임시정부 측의 소신이었다.
김구는 미군정뿐 아니라 소련측으로부터도 배척되었다. 1946년 3월 20일 미ㆍ소공동위원회가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렸다. 소련 대표 스티코프가 김구를 ‘반동적ㆍ반민주주의적’이라고 비난하면서 “앞으로 수립된 민주주의 임시정부는 모스크바 3상회의를 지지하는 민주주의 정당과 사회 단체를 망라한 대중 단결의 토대 위에서 창설되어야 한다”고 하여 사실상 김구와 임시정부 세력을 배제하는 발언을 하였다. 김구는 격노하여 하지와 만난 자리에서 이를 따졌다.
김구 : 장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는데 당신들은 나라를 전략적으로 점령한데 불과하오. 자주 독립 정부를 세워야 할 것이 절실한 당면 과제인데 미ㆍ소 양국이 한국에 신탁 통치를 실시한다는 것은 잘못이 아니겠소.
하지 : 김구 선생, 신탁통치안은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조치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 역시 한국의 자주정부 수립을 희망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김구 : 아니 잠정적인 조치일 뿐이라니, 물론 장군도 소련 스티코프란 자의 개회사를 기억 하고 있을 것이 아닙니까. 분명히 말해두겠지만 이번에 열리는 미ㆍ소공위는 한민족 전체의 염원을 짓밟는 강대국의 처사라고 아니할 수 없소. 따라서 신탁통치를 반대 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당연하고도 엄숙한 의사표시인 것이오.(《백범김구전집》, 제5권)
미ㆍ소공위가 결렬되고 한국 문제가 유엔으로 넘어가 남한 단독 선거가 결정되면서 김구는 김규식 등과 남북협상을 제기하고 평양에서 북한 지도자들과 만나 단선ㆍ단정을 반대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논의했으나, 결과적으로 남북한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김구 주석의 암살로 사실상 종료되고 말았다.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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