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웅의 해방 70주년 역사 키워드 70(7)
헌법, 어떻게 무엇을 담았나
국가의 기본법인 우리나라의 헌법은 어떻게 제정되었는가. 1948년 5월 10일 초대 민의원 선거가 실시되고 당선된 의원들은 6월 1일 국회 본회의에서 헌법 기초위원 선임을 위한 전형 위원을 각 도 별로 1명씩 10명을 선출하였다. 그 전형 위원들이 30명의 헌법 기초위원을 선출하였으며, 사법부ㆍ법조계ㆍ교수 등 각계에서 권위 있는 10명을 전문 위원으로 선임하였다.
헌법 기초위원장에는 서상일이 선임되고 기초 위원은 유성갑ㆍ윤석구ㆍ김상덕ㆍ허정ㆍ조헌영ㆍ조봉암ㆍ이청천 등이, 전문 위원에는 유진오ㆍ권승렬ㆍ윤길중 등이 선임되었다. 헌법 기초위원회는 6월 3일부터 22일까지 16차례 회의를 열어 전문 10장 102조의 헌법안을 초안하였고, 23일 국회본회의에 제출하였다.
헌법 초안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한민국임시헌법’ 그리고 미군정시대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에서 마련한 헌법안, 1919년에 제정된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의 헌법을 모델로 삼았다.
“바이마르 헌법은 그 당시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세계적으로 가장 앞선 민주헌법이었다”(오인석, 《바이마르공화국의 역사》).
실무적으로는 유진오가 개인적으로 마련한 초안을 중심으로 심의되었다. 유진오의 초안은 바이마르헌법이 모델이 되었다.
제헌 헌법은 심의 과정에서부터 정치세력간의 알력을 갖게 되었다. 이승만 측은 대통령제를 선호하고, 한민당 측은 내각제를 바랐다. 이승만은 자신의 집권이 예상되면서 강력한 대통령제를 원하고, 한민당 측은 대통령은 이승만을 선출하되 실권은 자신들이 갖는 내각제를 바랐다.
헌법 기초위원회에서 처음 만든 안은 내각책임제였다. 즉 상징적 대통령으로 하고 실권은 국무총리에게 부여하는, 국회에 의한 내각의 통제 등을 특징으로 하는 시안이었다. 이 헌법안은 6월 15일 이승만이 헌법 기초 위원회에 출석하여 “직접 선거에 의한 대통령책임제가 적합하다”고 발언한데 이어 며칠 후 다시 “이 초안이 헌법으로 채택된다면 이 헌법하에서는 어떠한 지위에도 취임하지 않고 민간에 남아서 국민운동을 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대통령 지위가 아니라면 정부 참여를 거부하겠다는 협박이었다.
“이에 한민당 측은 고민에 빠졌다. 만일 김구ㆍ김규식에 이어 이승만 마저 정부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 정부는 약체정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21일 밤 서상일ㆍ김준연ㆍ조헌영 등 한민당 측 중진의원들은 이승만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합의했다”(박찬승,《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이렇게 하여 대한민국 헌법은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중심제로 탈바꿈되어 6월 22일 헌법 기초위원회에서 채택되었다. 초장부터 ‘위인설관’의 비극적 운명을 타고 태어난 셈이다.
국회 헌법기초위원회에 내놓은 유진오 헌법 초안의 제1조는 “조선은 민주공화국이다”로 시작되어 “주권은 인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온다”로 이어진다. 당시에는 대체적으로 ‘국민’ 대신 ‘인민’ 이라는 용어가 널리 쓰였다. 미국 독립선언이나 프랑스 혁명의 인권선언, 유엔 인권선언의 피플은 국민보다 인민에 더 가깝다.
국호를 둘러싸고도 치열한 논쟁이 일었다. ‘조선’과 고종이 1897년 건원칭제를 단행하면서 채택한 대한제국의 ‘대한(大韓)’을 찾아서 광복하자는 이름을 다시 찾아 써야한다는 주장이 맞섰다.
결국 투표로 정하기로 했다. 헌법 기초위원 30명 중 26명이 참가한 투표 결과 대한민국 17표, 고려공화국 7표, 조선공화국 2표로 ‘대한민국’ 이 국호로 채택되었다.
유진오 헌법초안의 전문(前文)에는 “3.1혁명의 위대한 독립 정신을 계승하여”라고 되어 있는 부분을 이승만 의장(국회)이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고 고쳐줄 것을 주문했다. 이리하여 ‘3.1혁명’ 이 ‘3.1운동’으로 표기하게 되었다.
제헌헌법은 이승만의 권력 야망으로 권력체제 문체에서 변질되기는 했으나 국민주권주의에 바탕하는 진보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 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와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로 이어지는 헌법 전문은 신생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방략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민주 독립국가를 재건”이란 대목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승계한다는 뜻이다. 최근 보수 일각과 사이비 사학자들이 8.15 정부 수립일을 광복절 대신 건국절로 하자는 주장이 얼마나 무식하고 반 헌법정신인가를 살피게 한다.
헌법 전문에 나타나는 대한민국 국가건설의 정신은 ➀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➁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➂ 민주주의 제도를 세우고 ➃ 모든 영역에서 개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여 능력을 발휘케 하고 ➄ 국민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세계선진 민주국가 어느 나라의 헌법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내용이었다.
특히 본문 제2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조항은 임시정부의 헌장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며, 제1조의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라는 국호와 정체의 규정에서 단순한 ‘공화국’이 아닌 ‘민주 공화국’이라고 표현한 것은 바이마르공화국의 헌법에도 없는 매우 독창적인 내용이다.
훗날 군사독재 정권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쓰고, 최근 보수 세력이 이 용어를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지만, 우리나라 제헌헌법 정신은 일체의 관사를 허용하지 않은 ‘민주공화국’ 즉 ‘민주주의’ 공화국일 뿐이다. 민주주의에 관사를 붙이면 정치적 불순성이 담보된다. ‘민족적 민주주의’, ‘인민 민주주의’ 따위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제헌헌법의 특장 중의 하나는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민주주의였다. 경제적 민주주의는 임시정부가 채택한 조소앙의 삼균주의 즉 정치적 균등, 경제적 균등, 교육적 균등사상을 이은 것이다. 헌법 전문의 중간 부분에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라 하여 삼균주의적 요소를 담고 있다.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마련된 제9차 개헌의 119조 1항은 “균형 있는 국민 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적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제헌헌법의 경제적 균등 정신을 뒤늦게 채택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 정의’를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다가 집권 후 폐기한 것은 헌법정신에 위배된다.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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