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호의 너른마당(63)
2020년, 파란만장한 역사의 점철 그리고 성서의 시선
우리에게 2020년은 한일합병과 식민지로서의 전락이 이루어졌던 1910년에서 110년이요, 한반도 분단의 결과인 1950년 6·25 전쟁으로부터 70년,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일으켜 세운 1960년 4·19 혁명 60주년, 그리고 군사정권에 맞서 싸운 1980년 5·18 민주항쟁 40주년이다. 실로 파란만장한 역사의 점철이다.
영국의 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라고 규정하면서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이라는 전쟁 체제의 연속에서 얼마나 많은 인간이 희생되었는가를 증언한다. 우리 역시 그런 극단의 시대를 통과하면서 근현대사를 이어왔고, 21세기는 그런 극단의 시대를 초극할 수 있는 역사를 갈망한다.
그러나 이러한 미래의 조명은 그저 되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를 어떻게 바라보고 성찰하면서 그 교훈을 되씹어 미래의 자산으로 삼는가에 달려 있다. 성서는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근본적인 성찰의 기반이 된다. 성서는 히브리 민족이 아주 오래 전 겪었던 역사의 고투를 두고두고 되돌아보면서 현실의 힘으로 삼는 것을 보여준다. 유랑과 추방, 망명과 노예적 삶, 탈출과 해방, 무수한 전쟁과 평화, 분단과 통일, 패망과 재건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성서는 그 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읽도록 일깨운다. 함석헌 선생이 오래 전 『뜻으로 본 조선 역사』를 펴냈던 것도 우리의 과거를 그런 하나님의 시선으로 통찰하자는 의미였다.
역사의 실체로 육화된 하나님의 섭리를…
유대 역사에서 유월절이 갖는 의미는 결정적이다. 이는 억압되어 있던 피압박 족속이 하나님의 해방 사건으로 해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하나님 나라의 주체로 서는 길에 대해 신념을 가지게 되는 사건이다. 달리 말해, 영구 혁명적 신앙의 반복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출애굽 사건은 역사와 믿음이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 까닭에 역사를 바라본다는 것은 하나님과 마주한다는 이야기가 되며, 그것은 현실을 감당하는 능력에 대한 갈망이자 미래에 대한 전망이기도 하다.
성서는 사실 거듭해서 역사의 교훈, 즉, 역사 속에 드러난 하나님, 역사의 실체로 육화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으라고 말하고 있다. 이걸 깨우치지 못하거나 망각한 자들의 비극과 패배를 또한 함께 조명하고 있다. 왕들의 역사는 이걸 각성했는가 아닌가로 판명되고 평가되고 있다.
이미 오래 전 과거에 하나님께서 드러내신 뜻을 아직도 깨우치지 못한 채 있다면 그건 어리석게도 패망으로 가는 지름길을 택한 자가 된다. 역사는 그런 뜻에서 보자면, 과거라는 시간을 통해서 미래를 위해 개봉된 하나님의 섭리라고 할 수도 있다.
지금껏 서구 철학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독일 역사철학의 대가 헤겔은 서구의 역사만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아시아의 역사를 열등하게 보았다는 오류가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역사에서 자기를 드러내고 실현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정신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한 인물이다. 절대정신의 근본에는 자유가 있고, 이 자유가 어떤 역사의 과정을 거쳐 자신을 이루어나가는가를 본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대로, 역사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절대정신 하나님의 실체와 그 뜻을 헤겔은 추적해나간 것이다.
헤겔의 역사철학적 방법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나, 그에게서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역사를 현상으로 기억하지 않고 그 안에 담긴 뜻으로 푼 것이다. 이는 역사철학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성서의 역사관을 철학적 용어로 재정리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함석헌 선생의 역사관도 그런 차원에서 보면 우리 역사에 대한 헤겔적 풀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그와 다른 것은 서구 중심의 사관이 아닌, 우리 자신의 내면을 존엄하게 바라보면서 다가갔다는데 있다.
헤겔이나 함석헌 선생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사의 깊은 심연에 흐르는 보편적 의미를 추구하려는 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성서적 역사관을 가지게 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나 현상을 그것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본질적 차원의 깨우침과 연결되어 있는가를 발견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서는 역사이해와 역사철학적 시선에 중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우리의 근현대사
이러한 성서적 시선을 전제로 하고 우리의 근현대사를 총괄적으로 보자면, 19세기 중후반 조선조는 봉건체제의 모순을 경험하면서 숱한 농민들의 봉기와 사상적 전환기를 맞이했고 이 과정에서 주체적인 근대화 전략이라는 선택을 밀고 나가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역사의 중심에 인간에 대한 존엄한 권리의 존중이라는 생각보다는, 신분과 계급적 차별의 심화로 역사의 동력을 상실했고 이기적 기득권의 방어에 치우치면서 세계적 흐름에서 동떨어져나가는 상황에 처했던 것이다.
물론 그런 과정에서도 기회는 있었다. 1884년 김옥균의 갑신정변, 1894년 동학농민 전쟁 등 시대의 모순을 뚫고 주체적 근대화의 길을 갈 수 있었던 역동적인 시기가 있었다. 일본의 경우에는 1853년 미국 페리호의 위협 아래 식민지로 전락할 상황을 결국 1868년 명치유신을 통해서 극복해내고 동아시아에서 근대전략의 수행에 일정하게 성공한다. 반면에 조선은 여전히 중화적 세계질서에 복속된 채 시선을 밖으로 돌리지 못하고 만다. 역사의 거대한 바다가 출렁거리고 있는데, 조각배를 타고 샛강에서 아귀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이 세계사라는 맥락에서 어떤 모습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보다는 이미 쌓아온 기득권, 그것도 사실은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나가고 있는데도 그걸 모르고 계속 움켜쥐려다가 망하는 길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바로 세우지 못한 채 마주한 세계사의 대세는 조선을 황망하게 만들었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게 했으며, 그런 혼란의 와중에 일부는 저항하고 일부는 투항하면서 나라는 식민지의 늪에 빠져들어갔던 것이다.
조선의 20세기는 그렇게 해서 비탄과 비극으로 시작되었다. 1895년 청일 전쟁의 결과는 조선반도에서 일본의 국제적 발언권을 강화시켰고,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동아시아 전체의 패권을 쥐는 일에 보다 본격적인 능력을 얻게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일본은 미국과 영국의 협력, 지원을 기초로 조선반도 전체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는 것에 성공했던 것이다. 1868년 명치유신 이후 40년 만에 이룬 일이었고 아시아 최초의 근대국가 성립이라는 자신감에 넘친 일본은 제국주의 체제로 질주했고 그 첫 희생자는 우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조선의 근대사는 제국주의와의 접전이었으며, 이는 이후 조선 근대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제가 되어야 했다. 식민지가 된 나라의 최대 과제는 당연히 독립이었고 그 독립투쟁의 대상은 그냥 일본이 아니라 제국주의 일본이었기 때문에 제국주의에 대한 역사인식이 얼마나 철저한가에 따라 역사의 시대적 극복이 이루어질 것인가 아닌가가 결정되는 것이다.
히브리 민족에게 출애굽이 핵심적 사건이라면 그것은 고대 이집트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일이며 따라서 이는 제국주의의 굴레와 맞서는 일이기도 하다. 모든 인류에 대한 보편적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의 시선에서 보면 제국주의는 하나님과 대적하는 일이자 체제이며 이를 분쇄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실현을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바인 것이다.
그러나 한일합병 110주년이 다가오는 때 이 나라는 반일, 또는 일본에 대한 적대감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제국주의문제는 철저한 역사적 성찰의 내용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일본과의 적대적 긴장은 우리와 일본 사이의 종족적 모순이 아니라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만들어진 제국주의와 과거 식민지체제의 갈등과 대립의 문제인데 이에 대한 역사적 투시는 부족하기만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제국주의 지배종식을 위한 역사의식이나 세계관은 성장할 사이가 없었고 그것은 강대국에 대한 의존, 종속, 굴복을 역사 속에서 체질화해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성서는 히브리 민족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바로 서는 것보다 주변 강대국에 의존하는 것을 질타한다. 이는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말씀이다.
제국주의에 대한 역사적 성찰이 부족한 결과로도 민족 분단에 대한 극복 의지는 견고하지 못하다. 2차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두 개로 갈라놓았고 이는 결과적으로 남과 북 양 쪽에 분단정권을 세워 전쟁의 시작을 만들고 말았다. 김구 선생은 남과 북에 각기 독자적인 분단정권이 성립하면 전쟁이 필연적이라며 이를 치열하게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1950년 한국전쟁은 북의 남침이 그 직접적인 시작이었으나 보다 큰 맥락에서 보자면 1945년 이후 우리의 역사를 자주적으로 관리하고 해결하지 못한 결과였으며, 일본 제국주의 잔재를 철저하게 청산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들 일본 제국주의 잔재 세력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그대로 움켜쥐고 유지하기 위해 분단정권 성립에 광분했으며 이에 저항하고 반대하는 세력들을 거의 모두 빨갱이로 몰아 제거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이후 제국주의 청산이나 민족 분단의 극복을 위해 일어나야 할 남쪽의 민족적 역량은 결정적으로 소멸해버리고 만 것이다. 이런 토대 위에서 일어난 한국 전쟁은 전쟁의 끔찍한 비극을 낳았고, 그 과정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참혹함을 아직도 낫지 않는 상처와 응어리로 남겨놓았다.
70년이 되는 오늘날에도 한국전쟁은 남과 북 사이의 화해를 이루어내는데 어려움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당시 만들어진 휴전체제는 평화체제로 전환되고 있지 못하다. 전쟁이 한참인 때에는 휴전이 평화지만, 이 휴전이 길어지면서 그것은 전쟁을 다시 할 수 있는 역량의 비축기간이 되었고 남과 북 사이에 군사적 대치를 결정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길을 가로막고 있다.
평화는 성서의 근본사상인데, 한국전쟁 70주년은 그런 차원에서 생명의 역사를 다시 쓰도록 일깨우는 기점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한국전쟁은 여전히 대북 적대감을 고취시키는 근거로 작용하고 있으며 특히 교회에서는 남북 평화통일을 위한 것보다는 북한 붕괴론에 기여하는 소재가 되고 있다. 유다와 이스라엘로 분열되고 패망했던 히브리 역사를 돌아봐도 민족분단과 상호 적대감의 지속이 얼마나 민족 전체에 비운을 가져다주는지 분명한데, 한국전쟁 70년의 역사는 이런 점에서 그 의미를 재정리하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1960년 4·19 혁명은 이러한 분단과 전쟁, 그리고 제국주의 잔재 청산의 실패가 축적한 민주주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역사의 에너지였다. 이승만 독재는 제국주의 잔재 존속과 전쟁의 논리가 만들어낸 기득권 체제였고, 이로 인해 억압당한 민중의 저항이었다. 가난과 정치적 부자유, 사상과 표현의 자유 억압 등 당대의 현실은 민중 전체에게 숨 막히는 사태의 연속이었다. 쌓이고 쌓인 불만과 모순의 심화는 결국 발화지점을 만들어냈고 4·19 혁명은 그 발화의 현장이 된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역사의 정통성 논란에서 이승만 체제를 합리화하고 미화하려는 세력이 있는데 이는 4·19혁명으로 극복하려 한 역사의 과제를 모멸하는 것이며 역사의 역주행을 부추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바로 이러한 역주행은 곧바로 이어졌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는 정치적 혼란, 경제적 빈곤을 돌파하면서 새로운 독자적 근대화 전략을 만들어내겠다는 것이었으나 현실에서는 고강도의 억압과 역사의 후퇴를 가져왔다. 4·19 혁명이 만들어낸 공간은 이로써 사라졌고, 군사 쿠데타 주역이 일본 관동군 소속의 친일분자였다는 점에서도 역사에 대한 올바른 성찰은 더더욱 어려워졌다.
그렇게 이어진 역사의 퇴행적 전개는 18년간 이 나라를 괴롭히다가 무너져 내렸고 새로운 역사의 공간이 열렸다고 기대했지만 여전히 강력했던 군사주의 세력의 반격으로 1980년 5월 광주는 피로 물들게 된다. 80년 광주의 역사적 경험은, 이 나라가 여전히 분단, 지역주의, 빨갱이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이걸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는 한 역사의 발전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아직도 뇌리에 생생한데 광주의 5월이 벌써 40년이라니 세월의 흐름도 무상할 따름이나, 문제는 이 사건의 의미가 우리 대중 전체의 역사의식에 분명하게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광주는 광주지역의 문제라는 식의 시선이 많이 해소되긴 했지만, 이를 전국적 차원의 고뇌와 역사인식의 성찰적 단계로 밀고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떤 수준의 지점에 놓여 있는가를 일깨워 주고 있는 셈이다.
십자가 위에서 새로운 희망의 부활을 경험하는 역사를…
하지만 이런 역사의 단계가 다 비관적 결론을 내리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토록 암울했던 식민지의 역사도 막을 내렸고, 전쟁의 참화를 이겨내고 남과 북의 평화체제 성립을 위한 노력도 그간 적지 않게 축적되어 왔으며 민주주의의 문제를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이루어내려는 의지 역시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이 나라에서 다시는 군사주의자들이 정치를 지배할 수 있는 시대는 불가능하도록 하는 역사의 기반도 단단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진화해왔고 발전해왔다. 중요한 단계 하나하나를 거쳐 오면서 우리는 역사가 가야 할 길에 대하여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는 경험을 우리의 역사적 혈관 속에 기억하고 살아온 것이다. 이제 실로, 지난 110년의 역사를 깊이 성찰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담론을 힘차게 펼쳐야 할 때가 왔다. 나라는 자주해야 하며, 정치는 민주주의가 바로 서야 하고 민족은 하나가 되어야 하며 이제 국민의 의지를 거스르는 친일세력은 붕괴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역사의 격동 그 밑바닥에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숨 쉬고 있음을 확신해야 할 것이다. 이에 더하여 이러한 역사의 무수한 격랑 속에서 하늘의 뜻을 믿고 자신을 던져 희생한 이들의 피가 흐르고 있음도 아울러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역사는 언제나 십자가 위에서 새로운 희망의 부활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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