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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사랑을 한다면

by 한종호 2019. 3. 29.

한희철의 하루 한 샐각(89)

 

사랑을 한다면

 

화장실 변기 옆에 시집 몇 권이 있다. 변기에 오래 앉아있는 것은 좋은 습관이 아니라는데, 잠깐 사이 읽는 한 두 편의 시가, 서너 줄의 문장이 마음에 닿을 때가 있다. 시(詩) 또한 마음의 배설(排泄)이라면, 두 배설은 그럴 듯이 어울리는 것이다.

 

변기 옆에 놓여 있는 시집 중의 하나가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이다. 이대흠 시집인데, 구수한 사투리며, 농익은 생각이며, 시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중의 하나가 ‘성스러운 밤’이었다.

 

 

 

삼십 년 넘게 객지를 떠돌아다니다 갯일에 노가다에 쉰 넘어 제주도에 집 한칸 장만한 홀아비 만수 형님이 칠순의 부모를 모셨는데, 기분이 좋아 술 잔뜩 마시고 새벽녘에 들어오던 날, 그 때까지 도란거리던 노인들이 중늙은이 된 아들놈 잠자리까지 챙겨놔서 젖먹이 때인 듯 살포시 잠이 들었던 아들은 잠결에 무슨 소리인가를 듣게 된다.

 

“꿈결인 듯 아닌 듯 파도 소리가 막 들려오더래요 처음엔 파도가 파도를 베끼는 소린 줄 알았다가 바람이 파도를 일으키는 소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몸이 몸을 읽어가는 소리였는데요 칠십 줄 넘은 노인들이 한 오십년 읽어왔던 서로의 몸을 다시 읽는 소리였는데요 처음에는 얼굴이 붉어졌는데 가만 생각하니 너무 성스러워 고맙고 고맙더래요 애 낳기에는 늦어버린 허공이 된 몸들이 애를 쓰고 있었는데 그 소리에 더 묻히다 보니 거기서 나오는 바람 소리와 파도 소리가 혼자 노는 게 아니더래요 그래요 그것은 우주가 알 스는 소리였는데요 우주의 숨을 낳고 기르다가 다시 우주로 돌려주는 것이었는데요”

 

파도 소리 같기도 하고,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스님의 새벽 독경 소리처럼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소리, 그 소리를 듣는 아들, 맞다, 그 소리는 우주에 알이 스는 거룩한 소리였다.

 

사랑을 한다면 세월이 무슨 상관일까? 허공이 된 비쩍 마른 몸이 무슨 상관일까? 몸이 몸을 읽는 데는, 여전히 우주에 알이 스는 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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