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20)
진면목(眞面目)
본디 그대로의 참된 모습이나 내용을 진면목(眞面目)이라 한다.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누군가의 진면목을 보게 되는 순간은 많지 않다. 본다고 본 것이,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누군가의 겉모습이나 일부일 때가 많다.
다른 사람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때가 있다고 한다. 함께 여행을 할 때, 밥을 먹을 때, 도박판에 앉았을 때, 위급한 일을 만났을 때라는 것이다. 그렇겠다 싶다. 그런 일을 만나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비로소 알 수 있을 것 같다.
탈무드엔 사람을 평가하는 세 가지 기준이 있다. 키소, 코소, 카소가 그것이다. ‘키소’는 돈주머니를 말한다.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그 사람의 가치를 일러준다는 것이다. ‘코소’는 술잔이다. 무엇을 어떻게 즐기는지를 보아 그를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카소’는 분노다.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다스리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충분히 일리 있는 기준이다 싶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는 것은 의외로 단순한 것인지도 모른다. 눈물과 웃음일 수 있다. 언제 어디서 울고 웃는지를 보면 그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 함께 울 줄도 웃을 줄도 모르는, 어떻게 웃어야 하고 울어야 할지를 모르는 이들이 있다. 그런 이들은 웃어도 어색하고 울어도 어색하다. 울어야 할 때 웃고, 웃어야 할 때 우는 모습을 보는 것은 당황스럽다.
어제는 정릉교회 교사 야유회가 있었다. 그럴듯한 이름 대신 그냥 ‘야유회’(野遊會)라 명한 것이 담백했다. ‘들놀이를 벌이는 모임’, 거룩한 이들은 교사들의 모임을 두고 야유회가 뭐냐고 야유를 할지 몰라도, 오히려 시원하게 다가왔다.
허름한 건물 옥상 위에서 모임이 열렸다. 내게는 루프탑 모임이라는 이름이 낯설었는데, 그야말로 공간의 재발견이었다. 옥상은 주변에 폐를 끼칠 만한 것이 없다면 얼마든지 소용가치가 있는 공간이었다. 하늘은 물론 사방이 탁 트인 개방감은 다른 곳에서는 누리기 힘든 자유로움으로 다가왔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이들의 새로운 모습들을 보았다. 아니 저 사람이 저런 사람이었어, 깜짝 놀라게 되는 순간들이었다. 마침 그 자리는 5년 여 함께 했던 사람, 막 목사 안수를 받고 새로운 임지로 떠나는 목사 내외를 보내는 환송회를 겸한 자리였다. 따뜻한 웃음과 애써 참는 눈물들, 어쩌면 저런 모습이 저 사람의 진면목 아닐까 싶었다.
눈물이나 웃음으로 누군가의 진면목을 만나는 것은 소중하고 고마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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