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일까?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30)

 

나는 누구일까?
   

큰 딸 소리가 다시 독일로 돌아갈 날이 가까이 오면서 함께 연극을 보기로 한 것은 좋은 선택이었지 싶다. 정릉에서 대학로는 버스 한 번만 타면 되는 가까운 거리, 서울에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내와 소리가 정한 연극이 <12인의 성난 사람들>, 나는 처음 듣는 제목이었다. 요즘 연극을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했던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었다. 전좌석이 매진이었고, 좌석을 따로 지정하지를 않아 줄을 선 순서대로 입장을 해야 했다.

 

 

 


무대는 한 눈에 보기에도 단순했다. 평범한 의자들이 가장자리에 놓여 있었고, 공사장에서 쓰는 듯한 둥근 쇠파이프가 울타리처럼 둘러쳐 있었다. 설치된 무대만 봐서는 연극이 무척 단조롭거나 지루할 것처럼 여겨졌다.


연극의 상황은 단순했고 명확했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한 소년이 법정에 서게 되는데 모든 정황과 증거가 소년을 범인으로 단정하고 있었다. 법정 최고형인 사형 판결까지 남아 있는 절차는 하나, 배심원 12명의 만장일치 결정이었다. 모두가 유죄라 생각했기에 그것마저 쉽게 결정이 되려는가 싶을 때 무죄라 손을 든 한 사람이 있었고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상황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배심원들이 요구받은 것은 만장일치, 11명이 나서서 한 명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너무도 일방적으로 보이는 11:1, 그런 상황설정이 흥미로웠고 흡인력이 있었다.

 

지루할지도 모르겠다는 짐작과는 달리 110분이라는 시간이 잠깐인 듯 지나갔다. 주제도 주제지만 연극에 몰입하게 만들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배우들이 배우 같지 않았다. 배우처럼 연기하지 않았다. 배우라기보다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연기가 아니라 삶에서 마주하는 일상이었다. 연극에 등장하는 열두 명의 인물들은 다양한 인간 군상의 축소판이었다. 배우들 한 명 한 명의 캐릭터가 드러날 때마다 겹쳐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었다. 배우는 한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을 대표하는 얼굴이었다.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가 얼마나 쉽게 편견에 사로잡히는지, 편견은 얼마나 거칠게 현실을 왜곡하는지, 그래서 맹목적인 확신으로 자리를 잡는지, 편견과 왜곡이 집단화 될 때 우리가 얼마나 무감각해지며 용감해지는지, 애정이나 책임이 없는 논리와 주장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많은 것들을 돌아보게 했다. 말도 행동도 거칠기 그지없는 한 배우가 함부로 코를 풀고 사방 무대 위에 어지럽게 내버린 휴지조각처럼 공연 내내 온갖 주장과 갈등이 난무하지만 연극은 옳고 그름을 결정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끊임없이 질문을 한다. 당신은 12명 중 누구냐고, 누가 당신이냐고 말이다. 

 

연극을 보고 나와 음식점에 앉아 식사를 하면서도 대화는 오래 이어졌다. 과연 나는 누구인지, 누가 나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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