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96)
불씨 지키기
오래전 읽은 책 중에 <데르수 우잘라>가 있다. 러시아 장교인 아르세니에프가 당시 지도상의 공백 지대로 남아있던 극동 시베리아 시호테 알린 산맥 지역을 탐사하며 탐사의 결과를 자세하게 남긴 책이다. 미답의 땅을 탐사하며 만난 대지의 속살이 아름답고도 장엄한 모습으로 담겨 있다.
오지 탐사가 우리의 경험이나 관심과는 무관한 일인 데다 지역 또한 낯선 곳이어서 무덤덤하게 읽히는 대목이 적지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에 와 닿는 이야기들이 숨은 비경처럼 담겨 있었다.
탐사 지역은 지도에도 표기되어 있지 않은 오지, 워낙 추운 지역이고 날씨 또한 예측을 불허하기 때문에 성공적인 탐사를 위해서는 각종 준비물을 꼼꼼하게 챙겨야만 했다. 그것은 탐사의 성공 여부를 떠나 생존과 관련된 일이어서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탐사를 위해 물품을 챙길 때 가장 조심해서 챙겨야 할 물품이 한 가지 있었다. 성냥이었다. 만약 누군가 탐사에 가장 필요한 물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성냥을 꼽겠다고, 저자는 당연한 듯이 말하고 있다.
단 한 번의 부주의로 성냥이 몽땅 젖어버리는 일을 숱하게 경험한다는 것이었다. 늪지대나 산악지대는 워낙 습도가 높아 성냥을 가죽이나 고무로 싸봤자 소용이 없고, 특히 비가 쏟아지기 직전에는 아무리 신경을 써서 보관한 성냥이라도 불이 붙지를 않는다고 한다.
성냥을 보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있었는데, 성냥과 비슷한 크기의 나무상자에 보관을 하는 것이었다. 나무는 습기를 빨아들이기 때문에 날씨가 아무리 습해져도 성냥을 항상 건조하게 보관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오지를 탐험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물품이 성냥이라는 말이 뜻밖이다. 그럴수록 이 시대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옛 시절 며느리에게 주어진 매우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불씨를 지키는 일이었다. 화로 속에 불씨를 담고 그 불씨를 잘 지켜야 다음날 새벽이면 밥을 지을 수가 있었다. 어쩌다가 불씨를 꺼뜨리는 것은 몹시도 부끄러운 일, 게으른 며느리라는 핀잔을 들어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불씨’란 ‘불의 씨’, 다른 것은 다 사그라져도 그것이 있어 다시 불을 살려낼 수 있는 불의 씨앗인 것이다. 불의 씨앗만 있다면 꺼진 것을 다시 살려낼 수 있는 희망이 있다. 라이터가 아무리 흔하고, 스위치 한 번만 누르면 불이 붙는 편한 세상이 되었지만 불씨를 지키는 일은 여전히 중요하다. 어두워 가는 세상 속에서 희망을 지킨다는 것, 믿음을 지킨다는 것, 사랑을 지킨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꺼뜨려선 안 될 불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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