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08)
위장(僞裝)
1978년 서울 냉천동에 있는 감신대에 입학을 했을 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신학 자체가 두렴과 떨림의 학문이었던 데다가, 목회를 준비한다는 것은 더욱 그런 일이어서 모든 것이 다 새롭고 조심스럽게 보일 때였다.
그 때 만났던 사람 중에 강인호 형이 있다. 당시는 한 학년의 학생 수가 50명이었는데, 우리 학년에는 우리가 형이라 부르던 이들이 몇 명 있었다. 사회생활을 하다가 입학을 했거나, 군대를 다녀온 분들이었다. 강인호 형도 그런 사람 중의 한 명이었는데, 나는 언제 한 번 형과 편히 이야기를 나눠본 기억이 없다. 당시 나는 여러 면에서 숙맥이었고, 선뜻 다가가 이야기를 나눌 만큼의 숫기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런 내게 강인호 형은 공부도 잘 하고, 생각도 깊고, 뭔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이로 보였다. 그랬으니 나로서는 가까이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소식이 멀어진 이들이 있다. 강인호 형도 마찬가지였는데, 나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어서 다른 동기들도 형의 소식을 잘 모르고 있었다. 언뜻 듣기로는 미국에서 지낸다고 했다.
삼가던 페이스북을 시작하면서 몰랐던 이들의 소식을 접하게 될 때가 있다. 강인호 형의 소식도 그렇게 접하게 되었다. 페북을 통해 형의 일상을 대할 수가 있었는데, 역시 자유혼을 가진 사람처럼 살고 있었다.
며칠 전엔 형이 번역한 니체의 글을 만날 수 있었다. 니체가 쓴 <비도덕적 의미의 진리와 거짓>이라는 글을 형이 번역한 것이었다. 글은 소책자에 담아도 될 만큼 분량이 많았고, 니체의 글답게 내용도 쉽지 않았다. 글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걸 번역해 낸 형의 인내와 관심에도 마음이 갔다. 번역한 내용 중에 마음에 와 닿는 대목이 있었다. ‘위장’에 관한 내용이었다.
<지능은 개인의 자기 보존을 위한 수단이다. 그것의 주된 힘은 위장(僞裝)에서 발휘된다. 위장은 약자 혹은 덜 강한 개체가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것은 그들이 생존 투쟁에서 자신들의 뿔이나 포식자의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대항할 기회가 거부 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장의 기술은 인간에게서 정점에 달했다. 기만, 아첨, 사기, 현혹, 뒷담화, 거짓으로 앞을 가리기, 남에게 빌려온 영광으로 살아가기, 가면 쓰기, 관습 속에 숨기, 남 역할과 자기 역할 번갈아 가며 놀기, 한마디로, 허영의 외로운 불길 주변을 끊임없이 맴돌며 펄떡거리는 것이 인간들 사이에서 확고한 법과 규칙이 되었다. 그렇기에 인간에게서 진리를 향한 정직하고 순수한 열망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던 가를 찾는 일은 가장 알기 힘든 일이다.>
기만, 아첨, 사기, 현혹, 뒷담화, 거짓으로 앞을 가리기, 남에게 빌려온 영광으로 살아가기, 가면 쓰기, 관습 속에 숨기, 남 역할과 자기 역할 번갈아 가며 놀기…, ‘위장’ 중에 담긴 ‘뒷담화’ ‘남에게 빌려온 영광으로 살아가기’ ‘남 역할과 자기 역할 번갈아 가며 놀기’라는 말이 아프게 다가왔다. 폐부를 찌르는 듯했다.
우리들이 쓰고 있는 가면, 우리들의 위장은 그렇게도 다양하고 다채롭고 그럴 듯한 것이었다. 진리를 향한 정직하고 순수한 열망을 왜, 어떻게 잃어버렸는지를 아프게 헤아리게 된다.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의 주인 (0) | 2019.08.03 |
---|---|
하나님 일 한답시고 (0) | 2019.08.01 |
거북이 등짝이 갈라진 이유 (0) | 2019.08.01 |
같은 질문, 다른 대답 (0) | 2019.07.31 |
불가능한 일 (0) | 2019.07.3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