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79)
폭염이라는 호
다급한 목소리였다. 전화를 받자 대뜸 소식을 들었느냐고 먼저 물으셨다. 성격이 급하신 분이 아니기에 더욱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원로 장로님 한 분이 우리나라를 떠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소식을 접한 장로님은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라고 했다. 아침에 통화를 할 때도 그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데 그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무리 생각을 해도 느닷없이 우리나라를 떠날 일이 떠오르질 않아 당황스럽기만 했다.
황망한 마음으로 전화를 거신 원로장로님은 당신이 받은 문자를 내게 보내주겠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는 사이, 떠나겠다는 뜻을 밝혔다는 장로님께 전화를 드렸다. 어찌된 영문이지를 여쭙자 문자를 드릴 테니 읽어보라고만 하신다. 생각하지 못한 다급한 일이 생긴 것일까 싶어 쿵, 가슴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에 장로님이 보낸 문자가 왔다.
*작별 인사 올립니다
아쉽지만 여러분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뒤로 하고 저는 이제 한국을 떠나려 합니다. 그래도 짧은 시간이지만 오랜 여운을 간직한 채 다음을 기약하고 저 역시 다른 모습 다른 얼굴로 찾아뵐 수 있는 그 날을 기약하며 떠날 준비를 하렵니다. 저 때문에 본의 아니게 힘들고 괴롭고 지친 여러분들에게 무한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올리는 바입니다. 모두들 건승 하시고 저 떠난다고 너무 마음 아파하거나 아쉬워하지 말아 주세요. 저도 막상 떠나려하니 마음은 내키지 않습니다만 어쩔 수 없이 떠나야만 하는 이 심정 아프기만 합니다. 자~ 그럼 모두들 안녕히...
한 줄 한 줄을 읽으며 나도 심각해졌다. 가슴이 떨렸다. 장로님께 무슨 일이 생겼구나 싶었다. 하지만 마지막 한 구절에 폭소가 터졌다. 마지막 구절은 이랬다.
-2019년 "폭염" 올림
물러가는 폭염을 두고 한 이야기였다. 장로님의 유머가 지나쳤다며 웃고 있는데 조금 전에 전화를 걸었던 장로님이 다시 전화를 했다. 장로님은 당신이 받은 문자를 어떻게 내게 보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며, 어떻게 알려야 할지 안타까워했다. 그런 장로님께 그런 일 절대로 없을 것이니 조금도 걱정하지 마시라 말씀을 드렸지만, 장로님의 생각은 요지부동이었다. 떠난다는 장로님의 호가 ‘폭염’ 아니냐며, 진지하게 묻기까지 했다.
나중에 만나 식사를 하는 자리, 여러 사람 심장을 떨어뜨릴 뻔 했으니 식사를 대접할 만하다고 문자를 보낸 장로님께 말했다. 장로님도 기분 좋게 웃으며 기꺼이 그러겠다고 했다. 그런 교우들의 모습이 소중하고 아름다워 덕담 삼아 한 마디를 했다.
“저도 놀라긴 했지만 다함께 놀란 여러분의 모습이 보기에 좋습니다. 누가 떠난다고 하니 이리도 마음 아파하며 당황하는 모습이 말이지요. 우리나라를 떠난다 해도 이리 놀라고 서운했으니 이 세상 떠날 때는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요. 함께 지내는 시간 시간이 그만큼 서로에게 소중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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