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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폭우 속을 걷고 싶은

by 한종호 2019. 9. 7.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82)

 

폭우 속을 걷고 싶은

 

태풍 링링의 위력이 대단하다. 귀엽다 싶은 이름을 두고 어찌 저리도 당차고 거친 모습을  보여주는지. 하긴, 세상에는 이름과 실제가 다른 것들이 많은 법이니까. 곡식과 과일이 익어가는 이 땅 이 계절, 너무 심하게 할퀴지는 말라고 당부를 하고 싶다. 보통 바람이 아닐 것이라 하여 예배당 입구의 화분도 바람을 덜 타는 곳으로 미리 옮겨두었는데, 때가 되자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바람이 상륙작전을 하는 것 같다. 비의 양은 적지만 불어대는 바람은 실로 대단하여 이런 날카롭고도 묵중한 바람의 소리는 정말이지 오랜만에 듣지 싶다. 동화 ‘소리새’를 쓰며 썼던, 잘 되지 않는 긴 휘파람 소리를 낸다.

 

 

 

 

창문 앞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자니 떠오르는 시간이 있다. 이태 전 DMZ를 걷던 시간이다. 열하루 동안 홀로 걸어간 길, 문득 그 시간이 아뜩하게 여겨진다. 이틀째 되던 날, 진부령을 오를 때였다. 소똥령마을에서 어렵게 점심을 얻어먹고 진부령을 오르는 길, 갑자기 날씨가 변하더니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장한 폭우였다.


폭우는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여 바로 머리 위에서 천둥이 울렸고 번개가 갈라졌다. 어느 순간 폭우는 우박으로 바뀌기도 했다.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갈라질 때마다 비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 저 앞 어딘가에서 큰 바윗덩어리가 지축을 울리며 달려올 것만 같았고, 바로 머리 위에서 하늘이 찢어지듯 갈라지는 번개가 끝까지 나를 피할지 자신이 없어지기도 했다.


자동차들마저도 비상등을 켜고 내달리는 그 길을 걸어 오른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위태한지를 알면서도 그냥 걸었던 데에는 그런 시간이 다시는 내게 주어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동안 살아오며 만난 적 없는 최악의 악천후, 굳이 피하지 않고 그냥 걷고 싶었던 것이었다.

 

문득 그 시간을 떠올리며 빙긋 웃는다. 그 때를 떠올리면 어떤 상황 어떤 조건에서라도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거친 길을 걸은 자에게는 어떤 길도 순한 길이 된다. 최악의 상황을 견뎌낸 자에게는 더 이상 남아 있는 최악이 없다. 거친 바람 소리를 들으며 폭우 속을 걷고 싶은 마음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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