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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

가을비와 쑥병차와 쓰레기

by 한종호 2019. 11. 26.

신동숙의 글밭(9)

 

가을비와 쑥병차와 쓰레기


온종일 비가 내립니다. 강변에 단풍잎은 아직 자기의 때가 남았다는데, 그 마음 아는지 조곤조곤 달래듯 어르듯 가을비는 순하게 내립니다. 축축한 땅. 가벼운 바람결에도 속절없이 날리던 낙엽이 몰아쉬던 숨을 비로소 고요히 내려놓습니다.

 

이런 날씨에는 몸도 가라앉아서 내 마음 빗물에 젖은 한 잎 낙엽이 됩니다. 가슴이 시려 오는 것도 이제는 왠지 견딜 만하답니다. 창밖으로 바라본 하늘엔 회색 구름이 무겁습니다. 검도를 마치고 차에 탄 아들이 잠시 편의점에 들렀다 가자며 조릅니다. 복잡한 골목, 편의점 입구에 잠시 정차를 하고 카드만 주면서 꼭 필요한 것만 사오너라 했더니.

 

까만 비닐봉지에서 나온 것은, 옥수수 통조림, 모짜렐라 치즈, 컵라면, 초코과자, 버터맛 팝콘. 전부 다 기름진 군겆질거리들. 아들의 마음도 무거워져서 허전해서 그랬을까요. 단순한 허기인지요. 부쩍 많이 먹고 달게 먹으려는 어린 마음을 헤아리다가 내려놓기를 하루에도 여러 번입니다. 입으로 들어간 것보다 버리는 쓰레기가 더 많습니다. 잘 먹고 나서도 마음엔 그늘이 집니다.

 

머리 속을 서성이는 사유들. 그러다 문득 얼마 전에 사둔 쑥병차가 생각납니다. 올봄 가지산 자락에서 캐왔다는 쑥을 쪄서 돌돌돌 납작하게 말아서 동그란 모양. 오백원 동전 세 개를 쌓아 놓은 크기의 쑥병차가 오종종 유리병 안 가득 보입니다. 코르크마개를 여니 쑥향이 그윽합니다. 향에도 길이 있다면 그 향길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다 보면 본향에 닿을 것만 같은 그리운 향.

 

 

 

 

 

흙 도자기 잔에 쑥병차 한 개를 그대로 넣고 뜨거운 물을 붓습니다. 뜨거운 물이 닿자마자 쑥찻잎이 스르르 춤사위를 펼치듯 꽃잎처럼 사방으로 둥글게 피어납니다. 고즈넉한 쑥향에 비로소 마음이 머뭅니다. 한두 모금 마시니 몸이 따뜻해져 옵니다. 쑥이 좋은 것은 중용의 도를 지녔기 때문이라던 얘기가 떠오릅니다.

 

몸이 차가운 사람은 체온을 높여 주고, 몸에 열이 많은 사람은 열을 내려 주어 심신이 편안하도록 도와주는 쑥. 밭둑이나 논둑, 산자락 어디든 우리네 둘레에 흔하디 흔한 쑥은 옛부터 사람에게 덕스러운 식물이었습니다. 지금 현실이 안타까운 것은 당장 집 주변만 둘러 보아도 어린 자녀들 손에 흔하게 잡히는 음식들이란, 현란한 비닐과 코팅 종이와 플라스틱으로 포장된 가공식품들이라는 점입니다.

 

봄이면 쑥을 캐던 시절로부터 너무나 멀리 와버린 현실에 씁쓸한 마음 거둘 수가 없답니다. 어느 시점에선가는 포장 쓰레기 버리기를 멈추거나 속도를 늦추어야만 할 것 같은. 그러지 않고선 썩지도 않는 산업 쓰레기를 더이상 지구가 감당하기엔 무리가 있다 싶은 것입니다. 자연에서 멀리 떠난 산업 생산 현장이란 어느 곳 하나 킬링필드가 아닌 곳 없음을 봅니다.

 

오래전 윤동주의 슬픈 피라미드가 이제껏 서 있음은. 지배와 피지배의 잔혹사를 두고두고 후손들이 뉘우치라는 뜻일 테지요. 피라미드의 겉모습에 감탄만 하는 낮은 의식으로는 산업 쓰레기를 어쩌지 못할 것입니다. 집채만한 돌이 허공으로 올라갈 때 깔리고 짓이겨지고 단말마로 추락했을 피지배 민족들의 한 서린 울부짖음을 깨어 있는 의식이 들을 수 있기를, 무뎌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때때로 무뎌지려는 제 가슴으로 향합니다.

 

아들 곁에서 덩달아 먹었던 기름기를 쑥차로 씻깁니다. 마시던 잔 그대로 뜨거운 물을 부어 서너 번 더 우려 마십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선한 것으로는 쓸모 없는 게 하나도 없기에. 남겨진 쑥찻잎이 아까워 질겅질겅 질긴 나물처럼 씹어 먹는 마음엔 감사함으로 차오릅니다. 그저 싱거운 맛으로 마음결을 순하게 고릅니다. 오늘의 글에 따스함이 스며 있다면 어디까지나 자연에서 나고 자란 봄햇살 담뿍 머금은 쑥이 주는 덕일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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