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숙의 글밭(28)
아침 서리를 녹여줄 햇살 한줄기
겨울이 되고 아침마다 서리가 하얗게 차를 뒤덮고 있는 풍경을 본다. 딸아이의 등교 시간을 맞추려면 바로 시동을 걸고서 출발을 해야 하는 시각. 시동을 걸면 2~3초 후 엔진소리가 들려온다. 그 시간의 공백 만큼 자동차는 밤새 속까지 싸늘하게 차가웠다는 신호겠다. 우선 와이퍼 속도를 최대치로 올리고 워셔액을 계속 뿌려 가면서 앞유리창에 낀 얼음을 우선 급한대로 녹이기로 한다. 뒷유리창과 옆유리창까지는 어떻게 해 볼 여유는 없다.
차를 출발 시킨 후 골목을 돌아 나오는 동안에도 좌우로 와이퍼의 힘찬 율동과 워셔액 분사는 계속된다. 아침 기온이 그런대로 영상에 가까운 날씨엔 뚝뚝 살얼음이 떨어져 나가듯 그대로 물이 되어 녹아서 흐르면 그만이다. 하지만 문제는 아침 기온이 영하일 경우에 대략 난감해지는 것이다.
하얀 서리를 녹이기 위해 분사한 워셔액이 찬바람과 만나면서 도로 얼어 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와이퍼의 부지런함까지 가세를 한다. 영하의 날씨에 와이퍼의 노력이란 앞유리창에서 순간적으로 얼음이 된 워셔액을 라이스 페이퍼처럼 얇게 도포하는 일에 다름 아닌 것이다. 자꾸만 하얗게 시야를 가릴 뿐이다.
골목을 빠져 나온 후 큰 도로로 접어들 때까지 앞유리창이 하얗다면 대책을 세워야 한다. 하지만 그때가 언젠가. 바쁜 출근 차량들이 이쪽저쪽에서 엉켜 들었다 풀리기를 멈추지 않는 러쉬아워의 시각. 큰 도로에 차를 멈출 수도 없고, 가려진 시야에 자칫 잘못하면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 운전을 하는 일이 그야말로 살얼음판을 걷는 것만 같아 운전대를 잡은 두 손엔 잔뜩 힘이 들어간다.
이때 믿는 것은 오로지 한가지 밖엔 없다. 태양빛이다. 다행이 딸아이의 중학교 방향이 동쪽에 있다. 아침해와 마주보며 달리는 것이 마지막 보루가 된다. 와이퍼의 율동과 워셔액의 힘겨운 노력이란 따뜻한 햇살 한줄기에 미치지 못함을 절절히 깨닫는 순간이다. 가리게로 눈을 살짝 가린 후 마주보는 태양빛의 찬란함이란. 감사와 감탄의 기도가 터져 나온다.
아. 그렇다면, 밤새 싸늘히 식은 가슴으로 맞이하는 아침이란. 그런 날엔 내 눈에도 잔뜩 하얀 서리가 끼어 있었던 건 아닌지. 생각이 거기에 닿는다. 얼음장 같은 가슴을 채 녹이지도 못하고 하얗게 서리가 끼어 앞도 분간 할 수 없는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았을 하늘과 가족과 만나는 사람들과 그동안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는 것이다. 내 마음이 얼음장처럼 차갑다면, 내 시선도 서리가 낀 유리창이었을 테니까. 선명하게 볼 수 없는 그런 시선이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알 수 없는 시린 가슴을 견디지 못해 나 스스로가 만들어 내었을 와이퍼의 율동과 같은 힘겨운 노력들이 일어났다 사라지고. 워셔액과 같은 눈물이 흐르고 또다시 얼어 붙는. 그런 노력에도 내 가슴이 계속해서 싸늘하다면, 순간의 시선을 녹일 수는 있을지언정. 정작 영하의 날씨처럼 가슴이 녹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스스로의 힘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 시선에는 다시금 하얗게 서리가 끼었을 테지. 싸늘한 서리가 내 시야를 가리고, 누군가에겐 얼음 화살을 쏘았을지도 모를 차가운 아픔.
딸아이를 내려 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그렇게 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이다. 백미러로 본 뒷유리창엔 아직도 서리가 하얗다. 중앙선 너머로 달려오는 차들의 앞유리창이 십 여 분 전의 내 모습과 어딘지 닮아 있다. 겨우 눈만 내놓은 모습들. 뱅뱅이 안경을 낀 듯한 모습에 살풋 웃음이 일다가도, 이내 기도한다. 부디 목적지까지 다들 무사히 도착하기를 비는 마음이다. 차가 집에 당도할 무렵엔 뒷유리창도 녹아 있을 테지.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태양을 향해 있었으니까.
어쩌면 싸늘히 식은 가슴이 오로지 구할 수 있는 것은 따스한 햇살 한줄기가 아닌지. 스스로가 등을 돌리지만 않는다면, 태양을 마주 향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추운 겨울날 아침마다 자동차 앞유리창의 서리를 녹여 줄 한줄기 햇살의 은혜를 구하는 간절함으로. 밤새 식었을 내 시린 가슴은 아침마다 따스한 한줄기의 햇살을 구한다.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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