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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

<오페라의 유령>과 '잃어버린 어린 양 한 마리'

by 한종호 2019. 12. 16.

신동숙의 글밭(33)

 

<오페라의 유령>과 '잃어버린 어린 양 한 마리'

 

나를 위해 언제나 기도하시는 백집사님, 그분의 정성과 성실함 앞에 더이상 거절을 할 수 없어서 동행한 25주년 공연 실황 녹화. 스크린으로 보는 <오페라의 유령>.

 

화려하고 웅장한 노래와 춤, 의상, 배우들의 아름다움 앞에 내 마음 왜 이리 기쁘지 아니한가.

 

무대 위 200벌이 넘는 화려한 의상과 목소리와 배우들의 표정. 뼈를 꺾은 발레 무희들의 인형 같은 몸짓과 노랫소리. 지하실에서 울려 나오는 노래 노래 노래 오페라의 유령. 눈과 귀를 현혹시키는 저 화려함 현란함 요란한 박수 갈채 속에서 나는 그 뿌리를 보는 것이다.

 

건물 안과 건물 밖을 나누고
무대 위와 무대 아래를 나누고
주인공과 엑스트라를 나누고
공연자와 관람자를 나누고
로얄석와 일반석을 나누고
고용인과 노동자를 나누고
건물주와 세입자를 나누고
천국 티켓이 있고 없고
나누고 쪼개어진 사랑 앞에 아픈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햇살처럼 평등한 말과 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누구나 책을 읽고, 생각하고, 대화하고, 일하고, 함께 춤추고 노래하고,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자유롭고 공평한 삶을 그려본다.

 

사람이 가장 행복한 상태를 교육학에선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배우고 생각하고 말하며 그것을 함께 나누는 삶.'이라고. 나아가 분업보다는 협업을 지향하는 삶을 원한다. 더불어 어울려 살아가는 삶. 함께 씨를 뿌리고 함께 김을 메고, 가족이 함께 저녁밥을 먹는 일상이다. 그런 일상이 예술이 되는 삶을 그려본다.

 

공연장 건축에 노동으로 참여하지 않는 어느 설계자와 고용인의 무쇠같은 심장을 본다. '내가 대접 받고 싶은대로 남을 대접하라.' 성경의 황금율이다. 내가 노동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서 설계도만 가지고 남을 시키는 행위는 이 말씀에 의하면 죄에 해당된다. 설계자와 고용인과 피고용인이 다함께 참여하는 건축이라면 여러모로 설계도가 달라질 것이다. 아마도 건축사가 새롭게 쓰여질 것이다. 그럴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내가 보는 죄란, 나와 남이 다르다고 보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생명을 수단과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만큼 무서운 시선이 있을까. 그 극치가 마루타 실험이 아니던가. 머릿 속 설계도만 건네 주고 정작 자신은 노동에서 빠진 후 감독만 하겠다는 시선이 근본적으로 그와 다르지 않음을 본다. 노동을 해야하는 입장이 자신이거나 자신의 아들이라면 돌을 쌓기 위해 위험천만한 공중 밧줄 하나에 달랑 몸을 매달진 않을 테니까. 사람이 수단이 되어서 지금도 이 땅 어디선가 하늘로 올라가는 슬픈 바벨탑들. 그렇게 하늘로 오르는 벽돌은 킬링필드의 성곽이 될 수밖에 없다. 그곳에선 언제든 위험천만한 일이 도사리고 있을 테니까.

 

반대로 나와 너가 다르지 않다는 시각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에서 파생된 개체. 나와 너는 하나다 라고 보는 시각에서 사랑은 출발할 것이다. '내가 대접 받고 싶은대로 남을 대접하라.'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살면서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람이 마음이 아니었던가. 교회에서 성도들이 쉬지 않고 드리는 기도제목이 아니던가.

 

 

 

설계도와 고용인의 감독 하에 건물을 올리다가 손가락이 잘려 나가고 낙상했을 이름 없이 꺼져간 피고용인들의 단말마를 듣는 것이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아 문이 닫힌 공연장 밖, 엄마 손을 잡고 서 있는 애타는 어린 눈망울을 보는 것이다. 서로가 주인공이 되려고 주고 받았을 무대 뒤의 질투와 모함을 보는 것이다. 물론 게중에도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나름의 선량한 양보도 분명 있었으리라.

 

슬픈 피라미드, 무서운 채찍을 휘두르던 멋진 카리스마 앞에 눈을 가리고 귀를 닫고 입을 막은 선량한 내 이웃들의 탄식기도, 그들의 체념과 눈물로 <오페라의 유령>은 세상에 나왔으리라. 이 한 편의 공연은 진정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한 공연인가를 두고 사유를 이어가는 것이다. 사랑 앞에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고서 뒤돌아 주저 앉으며 절규하던 오폐라의 유령, 그의 눈물 앞에 잠시 나도 가슴이 울렸다.

 

한 편의 웅장한 공연을 올리기까지 수고한 자들의 땀방울을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그 땀방울이 하늘의 비처럼 공평하게 이 땅에 내릴 수 있었다면 바라보는 내 마음은 얼마나 흡족했을까.

 

별이 쏟아지는 저 대지 위 장막 곁으로 모닥불 하나 피워 놓고, 마을이 다함께 준비하며 더불어 함께 하는 모든 순간들. 흥얼거림이 기도가 되는, 누구나 어울려 모두가 주인공이 되어 노래하고 춤추는 저 맑은 이들의 천진난만한 아름다운 영혼을 본다. 덩달아 하나님도 기뻐서 춤추었을 태초의 춤과 노래를 보는 것이다. 천장에 막힘 없이 곧바로 하늘로 피어오르는 저 불꽃을 어찌 하늘이 흠향하지 않겠는가.

 

우리들 한가운데 예수를, 낮에는 꽃처럼 밤에는 모닥불처럼 피워 놓고, 그 둘레에 공평한 춤과 노래와 기도를 감사함으로 찬양하는 모습을 그려본다. 아름다운 우리들 모두의 영혼이 자신만의 향기를 내뿜으며 맑게 아름답게 꽃 피어나는 모습을 꿈꾼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이다.'

 

잃어버린 어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예수의 수고로움을 단 하루만이라도 한 순간이라도 덜어 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모두의 꽃 피어남은 곧바로 하늘로 올라갈 이 땅이 내뿜는 기쁨의 샘, 아름다운 하늘의 메아리가 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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