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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

감자를 사랑한 분들(1)

by 한종호 2019. 12. 17.

신동숙의 글밭(34)

 

감자를 사랑한 분들(1)

 

감자를 사랑한 분들의 얘기를 꺼내려니 눈앞이 뿌옇게 흐려집니다.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가마솥 뚜껑을 열었을 때처럼, 눈앞이 하얗습니다. 감자를 사랑한 분들을 떠올리는 건 제겐 이처럼 구수하고 뜨겁고 하얀 김이 서린 순간과 마주하는 일입니다.

 

가마솥 안에는 따끈한 감자가 수북이 쌓여 있고, 제 가슴에는 감자를 사랑한 분들 얘기가 따스한 그리움으로 쌓여 있답니다.

 

감자떡

점순네 할아버지도
감자떡 먹고 늙으시고
점순네 할머니도
감자떡 먹고 늙으시고
...

권정생 선생님의 <감자떡> 中

 

 

  삽화 그림 <감자를 먹으며> 글 이오덕 · 그림 신가영

 

딸아이를 학원으로 태워주는 차 안에서, "점순네 할아버지는 감자떡 먹고 늙으시고~"(백창우曲) 노래를 불러 줬더니, 뒷좌석에 앉은 딸아이가 푸하~ 하고 웃음을 터뜨립니다. 아마도 '감자떡 먹고 늙으시고'란 노랫말이 난생처음 들으면서 좀 촌스러운 듯하면서도 마치 가마솥 뚜껑을 열었을 때처럼 순간 환해지고 가슴이 따뜻해지면서 저도 모르게 한순간 웃음이 터졌을 테지요. 권정생 선생님의 싱싱하고 따뜻한 유머가 시대를 초월해 먹힌 것이지요.

 

우리도 집에 가서 감자 구워 먹을까 했더니, 딸아이는 모짜렐라 치즈를 많이 올려 달라고 합니다. 엄마가 주고 싶은 건 순수한 감자맛인데 아이들의 입맛은 이미 너무도 많이 국경을 초월해 있습니다. 이제와서 돌이키기엔 공연히 힘겨운 씨름이 될 것만 같습니다.

 

감자에 묻은 흙을 깨끗히 씻어서 오븐에 굽습니다. 감자는 따끈할 때 후후 불어 가면서 먹어야 제맛인데, 아이들은 아직 감자의 밍밍한 듯하면서도 쌉싸름하고도 담백한 그 깊은 맛을 잘 모릅니다. 아마도 모를 테지요. 그러니 아들은 설탕을 찾고 딸아이는 케찹을 찾을 테고요. 둘 다 함께 좋아하는 건 치즈를 듬뿍 올린 구운 감자입니다. 제 입맛도 가끔 치즈를 찾을 때가 있으니까요. 이쯤에서 회심으로 돌이켜야 할 건 정작 제 입맛인 듯 합니다.

 

어쩔 땐, 엄마가 한눈 판 사이에 치즈만 걷어 먹고 감자만 남기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세 살 버릇 아니, 입맛 여든 간다는 속담이 생각납니다. 엄마가 입맛을 잘못 길들였나 싶은 자책감이 잠시 스치기도 하고요. 또 한 편으로는 엄마 손길을 떠난 아이들의 입맛을 도로 길들이려는 욕심을 내보기도 하지만 이내 제 풀에 꺾이곤 합니다. 안그러면 철없는 아이들에겐 효과 만점인 매스컴 광고처럼 순수한 감자맛 스토리텔링을 덧입힌다면 어떨까 싶은 것입니다. 엄마의 숙제입니다.

 

눈만 돌리면 마트마다 알록달록한 먹거리들이 가득 쌓여 있어도 늘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것은 저만 그런지요. 언젠가 귀동냥으로 들었던 옛날 어른들의 얘기가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밭에서 감자 서리한 얘기. 입가에 까맣게 보리 이삭 구워 먹던 얘기. 칡뿌리 캐 먹던 얘기. 어릴 때 보리밥과 감자 옥수수 수제비를 질리도록 먹어서 커서는 한동안 안 먹었는데 나이가 드니 이제는 그 맛이 그립다는 얘기들. 그렇고 그런 옛이야기에 제 마음은 그리움으로 살이 찝니다.

 

굴뚝

감자를 굽는 게지 총각애들이
깜박깜박 검은 눈이 모여 앉아서
입술에 꺼멓게 숯을 바르고
옛이야기 한커리에 감자 하나씩.

윤동주의 <굴뚝> 中

 

아무래도 쌀 농사보다는 감자 농사가 사람의 손이 덜 갑니다. 언젠가 집에서 먹다가 싹이 오른 감자를 마당에 있는 손바닥만한 흙밭에 툭툭 던져서 흙으로 덮어둔 적이 있답니다.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우연히 발견한 동글동글한 감자알. 나중에야 싹이 난 조각을 던져둔 그 전 일이 기억납니다.

 

따로 물을 준 것도 아니고 고추처럼 지지대를 세워준 것도 아닌데, 감자는 순하게 착하게도 어느새 자라 있습니다. 본격적인 농사가 되면 수고로움이 없진 않을 테지만. 쌀 농사에 비하면 단순한 감자 농사가 글공부하는 농부에겐 어울린다 싶은 것입니다. 차 한 잔과 감자 두 세 알이면 한 끼 요기도 되고요. 맑은 몸과 정신으로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집중하기엔 감자가 그만이다 싶은 것입니다.

 

감자는 사람 손이 덜 간 만큼 하나님이 내려주신 비와 햇살과 더불어 흙이 품에 안고서 부지런히 감자알을 키웠을 테지요. 동글동글 순하게 착하게 보이지 않는 손길로 쓰다듬으며 정성으로 키웠을 테지요. 이어지는 권정생 선생님의 <감자떡>처럼요.

...
점순네 아버지도
감자처럼 마음 착하고
점순네 어머니도
감자처럼 마음 순하고

아이들 모두가 감자처럼 동글동글 예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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