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74)
삼세번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다고 장담을 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는 더욱 놀랄 만한 말을 덧붙인다.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가복음 14:30)
구체적인 숫자까지를 밝히신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 부인한다. 마태복음에 따르면(26:69~75) 베드로는 그냥 세 번을 부인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예수와 함께 있었다는 여종의 말 앞에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부인을 한다. 표정관리를 하며 시치미를 뚝 떼는 정도였다.
그러나 두 번째는 달랐다. 두 번째 부인을 할 때는 맹세를 하고 부인을 한다. 우리식으로 하면 이랬을까? 만약 그 말이 맞는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내 성을 간다고 말이다. 자기 말이 틀림없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하여 맹세까지 했다.
세 번째는 더하다. 이번에는 저주하며 맹세를 한다. 저주 속에는 예수를 향한 욕이 담기지 않았을까?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했던 그 입으로(마태복음 16:16) 더러운 욕을 쏟아놓지 않았을까? 내가 정말로 예수를 안다면 천벌을 받아도 좋다고 하지 않았을까?
‘3’은 단순히 숫자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성경에서는 ‘완전’을 의미하는 수다. 세 번 부인한다는 것은 부인하는 횟수가 세 번이라는 뜻만은 아니었다. 너는 나를 확실하게 부인할 것이다, 어쩌다가 실수로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부인할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었고, 설마 그럴 일은 없을 거라 했던 장담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정말로 완전하게 부인을 한 것이었다.
베드로는 제대로 넘어졌다. 때마침 울어대는 새벽닭의 울음소리, 순간 자신의 장담이 아무짝에도 소용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은 베드로는 너무나도 뻔한 자신의 초라함과 알량함을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 통곡을 한다.
우리는 그런 베드로를 안쓰럽게 여긴다. 혀를 차며 동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베드로와 다를 것이 없다. 베드로도 그랬는데, 하물며 우리들일까! 베드로와 우리가 다른 점이 있다면 삼세번의 부인이 아니다. 맹세와 저주를 동반한 부인이 아니다. 그런 일은 피차 다를 것이 없다.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통곡이다. 그래도 베드로는 새벽닭울음소리를 들었고, 그 소리를 듣고는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을 했다. 그 점에서 우리는 베드로와 다르다. 새벽이 되어 닭이 우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 아니냐며 새벽닭 울음소리를 무시하기도 하고, 요즘 새벽에 우는 닭이 어디 있느냐며 아예 새벽닭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기도 한다. 베드로와 우리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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