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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물 두 모금을 마신 사람

by 한종호 2020. 3. 13.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24)

 

물 두 모금을 마신 사람

 

군 생활을 하는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 이야기가 있다. 가뜩이나 요령이 없는 터에 그 이야기는 요령을 필요로 할 때마다 떠올라서, 더욱 요령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게 했다. 어쩌면 그것이 이야기가 갖는 힘인지도 모른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기 위해 기차를 탔을 때였다. 우리를 인솔하던 장교가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사막에서 전투를 벌이던 한 소대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물이 모두 떨어지고 만 것이었다. 사막에서 전투 중 물이 떨어지고 말았으니, 총알이 떨어진 것과 다를 것 없는 위기였다.

 

그때 한 병사가 어디론가 기어가 물을 구해왔다. 그가 구해온 물은 수통 하나였다. 지칠 대로 지친 30여 명의 소대원들에게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소대원들은 수통을 돌려가며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들려주던 장교가 그 대목에서 우리에게 물었다. 모두가 물을 한 모금씩 마셨는데 두 모금을 마신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두 모금을 마신 사람이 누구였겠느냐는 것이었다.

 

 


무더운 여름에 훈련소 생활을 해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30 여명의 군인들이 수통 하나의 물을 모두 마셨다는 이야기 자체가 뜻밖인데 그 중 두 모금을 마신 사람이 있다니, 이야기가 허황되게 여겨졌다. 물을 떠온 사람이라는 대답도 있었고, 소대장일 거라는 대답도 있었는데, 나로서는 떠오르는 이가 없었다.

 

대답은 뜻밖이었다. 물을 두 모금 마신 사람은 맨 마지막으로 마신 사람이었다. 대답을 들을 때 마음속을 지나던 떨림은 오래 남았다. 마지막 사람이 두 모금을 마셨다는 것은 앞서 마신 사람들이 물을 아꼈다는 것,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갈증 속에서도 뒤에 있는 전우들을 위해 겨우 입술만 적시고는 수통을 넘겼을 것이었다.

 

남이 알지 모르는 곳에서 혼자서 빵을 먹는 법을 배워야 하고, 없어진 물건을 남에게서 가져오는 것을 위치 이동쯤으로 여기는 법을 배워야 살아남을 것 같은 군대생활이었으니, 우연히 들은 그 이야기는 내내 마음을 괴롭힐 만 했던 것이다.

 

문득 그때의 이야기가 떠오르는 것은 마스크 때문이다. 마스크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다는 이 시절, 요일제를 만들어 비가 오는 중에도 약국 앞으로 긴 줄이 만들어지는 이 진기한 때, 내 뒤에 있는 이를 위하여 입술만을 적시고는 수통을 넘긴 사막 병사들의 마음을 우리가 가질 수는 없는 것일까, 사막 병사들의 마음이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이 어려울 때 우리에게 그런 마음이 없다면, 우리 삶이 제 아무리 풍요롭다 해도 우리 사는 이 땅은 사막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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