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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난 말, "제발, 꽃 보러 오지 마세요!"

by 한종호 2020. 3. 29.

신동숙의 글밭(122)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난 말, "제발, 꽃 보러 오지 마세요!"


봄이 오면 장사익 소리꾼의 곡조가 봄바람처럼 불어오는 듯합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둘째가 세 살이 되고 엄마 품을 벗어나려던 오래전의 이야기입니다. 거실에 펼쳐둔 신문을 넘기다가 하얀 목련꽃 한 송이처럼 눈에 들어온 사진이 있었습니다. 하얀 한복을 곱게 입은 장금도 명인의 하얀 춤사위. 진옥섭 연출가의 땀으로 장금도 명인의 민살풀이를 국립국악원 예악당 무대에 올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생애 마지막 무대가 될지도 모른다는 글줄에 예약을 부탁했습니다. 그해 6월, 저는 그렇게 십 여 년만에 자유의 몸이 되어서 혼자서 호젓이 서울행 KTX에 올랐습니다. 


6월의 서울 거리는 따사로웠습니다. 졸업 후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한 곳이 서울입니다. 강산도 변한다는 긴 세월을 훌쩍 넘기고, 오랜만에 걷던 가벼운 발걸음마다 그 시절에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이 꽃처럼 다시 피어나는 듯했습니다. 라일락꽃이 한창이던 6월의 어느 날, 돈암동 성신여대 앞 태극당 맞은 편에서 222번 버스를 타고 가던 이른 아침 출근길. 버스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히다가 깜짝 놀라서 몸을 바로 세우고 또 부딪히고, 그렇게 모자란 잠을 꾸벅이다가 잠결에 내린 압구정 3호선 버스 정류장, 그 바쁜 출근길에 청담동 언덕길을 없는 듯, 제 뒤를 따라와서 명함을 내밀던, 어느 종갓집 장손처럼 단정하게 생긴 청년의 수줍은 눈빛. 2년 남짓 생활하던 서울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아픈 사연도 있었지만, 세월이 한 구비 두 구비 흐른 탓인지 좋았던 기억들만 아름다운 선물처럼 남아 있습니다.


제가 앉은 곳은 관람석이었지만, 장금도 명인의 춤사위에 제 호흡을 실었습니다. 고요히 손끝으로 흐르는 선을 따라서 하얀 저고리가 허공에 그리는 수묵화 같은. 가벼운 듯 무거운 발뒤꿈치 끝이 내딛는 땅은 매 순간 이 세상 처음의 땅 같은. 가슴에서 숨이 드나들 듯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무의 춤 같은. 흐르는 물처럼 구름처럼 고독 속에 호젓이 구도자가 걷는 침묵의 길 같은 장금도 명인의 춤사위. 그 긴 침묵을 깨고 봄바람처럼 불어온 소리가 소리꾼 장사익이었습니다. 그 역시 가슴에서 샘솟듯 꽃을 피우듯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 산제비 넘나들던 성황당 길에~"



많고 많은 사건 사고들에 아랑곳없이 올해도 어김없이 남쪽에선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옵니다. 제주도에서 피기 시작한 매화는 섬진강으로 진해로 경주로 점점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페북에 연일 올라오는 벗님들의 꽃소식들로, 세상의 무겁고 어두운 소식들 사이에서도 틈틈이 가슴이 환해집니다. 산수유, 목련, 민들레, 꽃다지, 진달래, 벚꽃, 유채꽃, 제비꽃, 튤립......  추운 겨울을 견딘 후 올해도 한결같이 피어나는 꽃들이 한창인 봄날입니다.


이 봄날에 "제발, 꽃 보러 오지 마세요!" 이 땅에 무수히 많은 봄이 찾아왔지만, 아마도 이 세상에 처음으로 태어난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봄바람을 막으려는 무모한 일처럼 꽃놀이를 막으려는 마음들의 힘겨움이 조금은 헤아려지기에, 어쩔 수 없이 막아야만 하는 그 마음들이 무겁게 다가옵니다. 민살풀이의 장금도 명인이 내딛던 가벼운 듯 무거운 발걸음처럼 긴 호흡처럼, 훌쩍 떠나고픈 가벼운 마음을 내려놓고 또 내려놓으려 합니다. 


그렇지만 집 안에서 생활해야 하는 이 봄날에도, 사람은 사람이라서 아름답습니다. "~ 꽃이 피면 같이 웃고 / 꽃이 지면 같이 울던~" 가슴으로 숨을 쉬는 일이 또한 가슴으로 꽃을 피우는 일임을 스스로가 알아차릴 수 있다면, 매 순간을 영원으로, 지상에서 천국을 사는 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같이 웃고, 같이 울고, 같이 아름다울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세상이 또 있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겨울나무의 고독과 침묵 속에서 활짝 피운 봄꽃처럼, 지난한 일상 속에서 틈틈이 멈추어, 고독과 침묵 속에서 불어오는 성령의 자유자재하신 하나님을 봄바람처럼 느낄 수 있다면, 거룩한 성전인 제 가슴에도 꽃 한 송이 피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봄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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