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숙의 글밭(120)
예배 금단 현상인가, 예수 따르기인가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을 말한다면 침묵을 해야 하지만, 예배당 안에서 무리하게 예배 모임을 강행하려는 일부의 교회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된 이야기입니다. 연일 드물게 올라오는 포스팅에 답답한 마음이 가시질 않아서 제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현재 코로나 집단 감염 예방을 위한 공공수칙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전국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현 시국입니다. 그런 중에 일부의 기독교 목회자와 성도들의 모습에서 예배 금단 현상을 보고 있습니다. 중독과 금단 현상이란 곧 나의 신앙이 깨어 있지 못한, 졸음 운전처럼 졸음 신앙이라는 증거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종교란, 나와 이웃의 생명을 살리려, 깨어 있는 사랑이 될 때에만, 존재의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요. 그런 사랑이란, 매 순간 깨어서 나와 이웃을 보살피려는, 자비와 긍휼의 마음이 아닌가 하고요. 그처럼 열린 가슴에는 보다 이기적인 중독이 아닌, 보다 이타적인 중심이 자리 잡을 테니까요.
월 회원권을 끊어 놓고 헬스장과 수영장을 다니며 몸을 푸는 사람들은 하루만 쉬어도 몸이 무겁다고 합니다. 새벽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시는 권사님들은 어쩌다 새벽기도를 빼먹은 날은 하루가 영 시원찮고 허전하다 하십니다. 그리고 쉼없이 새벽기도의 재단을 쌓으십니다.
하지만 종교 생활이 단순히 하루의 몸풀기를 위한 중독의 대상으로 전락 될 때, 그렇게 졸음 종교가 향하는 길은 노쇠함이 아닌가 하고요. 저 역시도 빌었던 기도 제목처럼, 제 일신과 가족의 안락함과 물질의 부유함과 어딘지 모호한 세계 평화만을 기도 제목으로 삼으려는 기복신앙은, 맹목적 믿음을 낳고, 맹목적 추종을 낳고, 맹목적 졸음 종교인을 낳고, 중독적 종교 생활인을 낳고, 주변의 이웃들과 사회에 대해선 점차 무관심으로 흐를 소지가 다분한 종교적 태만이 아닌가 하고요. 토머스 머튼의 말처럼, '세례는 구원의 완성이 아니라 구원의 시작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삶 속에서 종교생활이 마약처럼 단지 중독의 대상일 뿐이라면, 그것은 생명이신 예수의 복음에 대한 신성 모독은 아닌가 하고요. 성령이 살아서 역사하는 신앙인의 가슴에선, 예배가 맹목적 믿음의 중독이 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가슴에 성령이 살아서 역사하시기를 간절히 원하는 신앙인의 가슴은, 닫힌 가슴이 아닌 열린 가슴일 테니까요. 머튼의 말처럼, '한 종교인의 영적 성숙도는 개방성에 있습니다.' 이방인과 이웃을 향해 언제나 열린 가슴이셨던 복음의 예수를 다시금 떠올려봅니다.
이웃들도 먼저 믿은 기독교인처럼, 똑같이 보고 똑같이 느낄 수 있는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뿌리에서 분화된 개체이니까요.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겐 너무나 상식이 된 개념이기도 합니다. 교회 건물 밖에 있다고 해서, 노아의 방주 밖에 있다는 의미가 아닐 것입니다. 그 옛날 예수는 예배당만을 찾아다니면서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전하시진 않으셨으니까요. 오늘날에도 당분간 예배당 안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고 하여, 삶 속에서 예배가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기를 원하시는 성전은 신앙인의 몸이니까요. 우리의 몸이 성전이니까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라고 이미 말씀하고 계시듯이요.
자유이신 하나님을 예배당 건물 안에만 가둬 놓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자유이신 하나님은 이 세상 어디든 가실 수 있는 살아 계신 분일 테니까요. 예전처럼 함께 모여서 간절히 주일 예배를 드리고 싶어하는 마음들을 모르는바는 아닙니다. 예전처럼 예배당 안에서 늘 가족처럼 함께 기도하며, 함께 예배 드리고, 함께 식사하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살갑게 지내던 성도들이 보고 싶고 그리운 마음들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내 가족과 내 교회의 교인이 소중한 만큼 주위에 이웃도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잃어버린 마지막 한 명까지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교회 안에 있든, 교회 밖에 있든 자기가 선 자리에서, 매 순간을 깨어 있으려는 자비와 긍휼의 모습으로, 세상을 비추어 주는 기독교가 저는 언제나 그립습니다. 그리고 간절합니다. 기독교를 손가락질 하는 세상 사람들 조차도, 그들의 마음 한 켠에선, 어느 순간 기독교인들이 따뜻한 가슴을 보여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따스한 가슴이란, 나와 너가 다르지 않다는 하나된 가슴에 불붙는 온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 따스한 가슴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은 빛과 소금 같아서, 거리의 전도지와 말이 없이도 가슴으로 바로 느낄 수 있는 그런 따스한 사랑일 것입니다. 예수가 하늘로 오르시며 이방인이나 모든 사람의 가슴마다 공평하게 성령을 선물로 주고 가셨으니까요.
저에겐 매일 찾아오는 하루가 암흑과 혼돈으로 시작됩니다. 그 무거움으로부터 하루를 깨우는 말씀이 있습니다. 현실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눈을 뜨게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 거듭 스스로에게 되뇌이는 것은, 저에게 다가오는 매 순간이 암흑과 혼돈 같기 때문입니다. 저는 늘 어렵습니다. 여기서부터 하루의 첫걸음, 어쩌면 매 순간의 첫걸음을 내딛으려 거듭 이 말씀을 먹고 아니, 품고 살아가려 하는지도 모릅니다. 육신의 호흡처럼 가슴이 그 한 말씀으로 끊임없이 숨을 쉬기를 원하는지도 모릅니다.
내딛는 한 걸음에 등불 하나를 조심스레 비추는 말씀,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 이 세상의 무수한 가치관과 혼돈의 땅을 살아가는 저에게 예수가 보여준 온전한 마음이 없었다면, 아니 몰랐다면 제 인생은 여전히 암흑과 혼돈 속에 헤매었을 지도 모릅니다. 진리의 영으로인한 그러한 스스로에 대한 물음과 인도하심이 아니라면, 세상은 그야말로 사이비 신천지와 극악무도한 n번방과 극도의 혼돈과 암흑의 세상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는 제가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길이 되고 진리가 되고 빛이 됩니다. 예수가 보여준 온전한 마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하나님과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한 말씀을 등불처럼 씨앗처럼 품기를 원합니다. 아마도 육신의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을 영혼의 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현실은 코로나19 바이러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킴으로, 다함께 무사히 견디며 지나가기를 바라고 있는 중요한 때입니다.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 제 스스로에게 거듭 던지는 물음을 되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혹시 예배 금단 현상으로 마음에 갈등을 겪고 계시는, 일부 기독교의 목회자와 성도들에게도 묻고 싶습니다. '나의 현재 신앙의 반응이 단순한 예배 금단 현상인가, 예수 따르기인가.' 그리고 또 거듭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의료진들을 비롯해서 구석구석 애쓰시는 분들이, 세상엔 드러나지 않은 곳에 더 많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이라면, 가슴에 살아 있을 성령과 예수가 가시고자 하는 곳으로 마음이 따라가기를. 안락한 예배당만이 아닌 가난하고 소외되고 어려움을 겪는 이웃들에게로, 몸이 갈 수 없다면 마음이라도 흘러갈 수 있기를, 예수라면 그리 하시지 않을까 싶은 마음입니다. 제가 성경에서 본 예수는 그런 분이시기에.
오늘의 한 걸음에 비추는 등불 하나는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 묵은 교리와 종교적 전통과 맹목적 믿음과 잠든 중독과 금단 현상들의 낡은 옷을 벗고, 홀가분한 자유의 날개옷을 입으신 예수를 가슴에 품기를 스스로가 원합니다. 종교가 예배 금단 현상을 일으키는 마약이 아닌, 깨어 숨 쉬는 생명과 자비와 긍휼과 사랑의 물길이 되어 세상으로 흐를 때에만, 살아 있는 종교로써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가 이 땅에 존재할 수 있는 이유가 되지 않은가 하고요. 그리고 이 '사회적 거리두기'의 시기가 지나고 더불어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그러한 교회를 통해서 예수의 복음은, 빛과 소금이 되어서 세상을 향해 비출 수 있을 테니까요. 여기까지 좀 지루한 사색의 산책길을 걸어왔습니다. 여기까지 다 읽으신 분들에게서 인내심의 은총을 봅니다. 노란 유채꽃이 살랑이며 푸른 하늘을 맑게 흔들어 놓고 있는 봄날입니다. 이제막 벚꽃이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이 아름다운 자연이 들려주는 경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오늘도 매 순간 고요한 예배의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내 영혼이 비로소 안식을 누리는 침묵의 기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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