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51)
서로를 신뢰한다면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장기화 되면서 당연한 듯이 누려왔던 많은 것들이 멈춰 서고 있다. 하늘을 날던 비행기마저 주차장 자동차들처럼 활주로에 늘어서 있는 풍경은 생경스럽기만 하다. 날개 꺾인 새들처럼 보인다.
독일에 있는 아이들에게 마스크를 보내는 일이 이토록 어렵다니. 인터넷으로 신청을 하고, 가족관계증명서를 챙기고, 그렇게 몇 차례 우체국을 왔다 갔다 하여 겨우 부치긴 부쳤다. 같은 주소에 살고 있음에도 한 명당 8개로 제한된 마스크를 각각 다른 상자에 담아야 했다. 비용도 만만치가 않았다. 필터는 아예 반출금지란다. 난리를 치듯 짐을 부치고 돌아서려 할 때 종이 하나를 내민다. 짐이 배달이 안 되어도 배상을 청구하지 않는다는 내용에 서명을 하라는 것이었다. 푸, 한숨이 나왔다. 그렇게 짐을 부친 지가 보름여, 짐을 보냈다는 문자 연락이 없어 확인을 해보니 아직도 짐은 한국을 떠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야말로 전에 없던 일들을 경험하고 있다. 생각조차 못했던 일들, 당황스러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어서 함께 모여 드리던 주일예배를 가정예배로 전환하는 전무후무한 경험을 하고 있다. 주일예배를 가정예배로 드리다니, 어느 누가 이런 시간이 올 것이라 예상을 했겠는가. 이런 와중에 누가 뭐라 해도 꿋꿋하게 모여 예배를 드리는 교회도 없진 않지만, 대부분의 교회는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을 하고 있다.
금방 끝나겠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사태가 장기화 되면서 고민은 깊어진다. 게다가 부활주일을 앞두고 있으니 고민은 더욱 깊을 수밖에 없다. 부활주일이 다가왔는데 때마침 더욱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요청받았으니 말이다. 정릉교회는 공예배를 가정예배로 대체한 것은 비교적 신속하게 결정을 했다. 마땅한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예배를 다시 재개하는 시기는 신중하게 결정을 하려고 하는데, 그렇다고 고민이 아주 없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헌금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정부의 시책을 존중하고 따르는 것이 교회가 지켜야 할 공공선이라 여기지만, 공예배의 중단과 재개여부의 기준을 교회 스스로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한 어색함과 불편함이 크다. 이런 일을 경험하고 나면 앞으로 위기가 닥칠 때마다 예배가 뒤로 밀리게 되는 것 아니냐는, 온라인 예배를 경험해보니 이런 방식도 괜찮다며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가 소홀해지는 것은 아닌가 싶은, 이런저런 걱정들이 있다. 예배를 계속해서 드리는 교회의 대부분도 같은 걱정으로 그런 선택을 했을 것이다.
걱정이 되면서도 가정예배를 이어가고,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시기를 신중하게 결정하려고 하는 데는 한 가지 중요한 근거가 있다. 교우들을 신뢰하는 믿음이다. 잘 이겨낼 거라는, 더욱 단단해지고 성숙해질 거라는, 잠시 흔들리는 것 같고 약해지는 것 같아도 잔가지 떨궈내고 더욱 의젓한 한 그루 믿음의 나무로 설 거라는, 그런 믿음을 끝내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으로 조급함을 버리고 믿고 기다리기로 하는 것이다.
교우들도 같은 마음이기를 기대한다. 때로 못미더운 구석이 있었다 해도 목사를 믿고 따라주는, 잠시 가시밭길을 지나는 것 같아도 이 길이 푸른 풀밭으로 가는 길임을 믿고 따라주는, 그런 신뢰가 있었으면 좋겠다.
서로를 신뢰한다면 이 어려운 시기, 우리는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은 것이다. 잃는 것보다도 더 소중한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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