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8)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 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 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漢江)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白頭山) 높았다
선열(先烈)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독자는 서로 다른 견지(見地)에서 본문을 본다. 그가 어디에 서서 그 본문을 보는가에 따라 번역은 축소(縮小)이기도 하고, 확대(擴大)이기도 하고, 굴절(屈折)이기도 하다. 원문과 번역문에 사용된 낱말의 의미 분야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원문의 단어와 대응어의 단어가 의미론에서 완전히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번역은 어떠해야 한다는 온갖 규정이 언어체험이 각기 다른 다양한 독자의 서로 다른 접근 앞에서는 무색해질 수밖에 없다. ‘원문의 뜻이 어떠하다’는 진술 자체가 허구일 수 있다. 번역된 본문은 이미 원문에서 떠나고 있고 새로운 독자를 만나 새 의미를 창조해가고 있다.
엊그제가 3.1절이었다. 1919년 3월 1일이었으니까, 꼭 96년 전이다. 만세 이후 광복(1945)까지는 26년을 더 기다려야 했고, 정부를 수립하기(1948)까지는 3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정인보 작사, 박태현 작곡의 삼일절노래를 불러본다. 한가운데 줄에 “이 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라는 가사가 있다.
노래를 불렀더니 “이 날” “의(義)” “생명(生命)” “교훈(敎訓)”이란 말들이 본문에서 바깥으로 툭 튀어 나온다. “태극기”도 툭 튀어 나와 내 눈 앞에 활자들이 움직인다. 나는 흥얼거리기 시작한다. 시편 118편 24절 “이 날은”(제 하욤)이다.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 This is the day, this is the day
that the Lord has made, that the Lord has made
We will rejoice, we will rejoice,
and be glad in it, and be glad in it.♩
“의”는 히브리어로 “체데크”다. 히브리어 “미쉬파트”, “체다카”, “체데크”, 그리스어 “디카이오쉬네” 등이 “의”로 번역되는 말이다. 이것이 신구약 성경에서 얼마나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지는 불문가지다.
“생명(生命)”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하임”이나 그리스어 “조에”가 성경에서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을 설명함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용어인가!
“교훈(敎訓)”은 히브리어 “토라”가 지닌 기본족인 의미다. 태극기가 “여호와 닛시”(여호와는 나의 깃발) 되어 펄럭인다. 나는 어느 새 “주님의 깃발을 높이 들어라. 주님께서 대대로 아말렉과 싸우실 것이다”(출애굽기 17:16)를 외치고 있다.
본문상호연결(intertextuality)은 번역에서도 발생한다. 성경의 본문과 우리의 본문이 한 독자의 언어 체험에 따라 서로 만나 해석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두 언어의 만남, 그리고 번역이 한 본문의 의미를 풍요롭게 하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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