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91)
몸이라는 도구
인우재 방에 깔린 비닐장판을 걷어내고 종이장판을 깔았다. 처음엔 흙 위의 멍석이 전부였다. 멍석이란 짚으로 만든 것, 생각하면 단순했다. 널찍한 돌로 된 구들장을 깔았으니 돌 위의 흙, 흙 위의 풀이 방바닥의 전부인 셈이었다. 방에 누울 때마다 자연 위에 눕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좋았지만 인우재를 찾는 이들이 불편해 했다. 엉덩이가 배기는 것보다는 벌레와 친하지 못한 이들의 불편이 참으로 컸다. 어떤 이는 경기에 가까운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결국은 멍석을 걷어내고 종이를 붙였다. 쌀을 담던 부대의 종이를 붙였다. 그렇게 지내던 중 먼 친척 되는 분이 요양차 1년여 머무는 동안 비닐장판을 깐 것이었다.
비닐장판은 물걸레질을 할 수 있어 편하긴 하지만, 인우재와는 안 어울렸다. 무엇보다도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방을 덥혀야 하는 구조에선 더욱 그랬다. 뜨거운 방바닥에 비닐장판, 마음부터 편하지가 않았다.
주일 저녁 아내와 함께 인우재를 찾아 다음날 새벽부터 일하기를 시작했다. 방의 짐부터 옮겨야 했다. 이부자리를 옮기고, 책꽂이를 비우기 위해 책을 옮긴 뒤 책장을 밖으로 냈다. 비닐장판을 벗겨내니 벽지 아래쪽 곳곳에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일일이 잘라내고 잘라낸 곳에 초배지를 바른 뒤 벽지를 발랐다. 방바닥에도 초배지를 발랐다. 방에 불을 때고 초배지가 마르기를 기다려 그 위에 장판지를 붙였다. 두툼한 장판지를 붙이기 위해서는 먼저 장판지를 물로 적셔두는 것이 필요했다.
간단할 것 같았지만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쪼그리고 앉았다 일어서는 동작을 수없이 반복해야 했다. 사이사이 쉬는 시간엔 불쑥 자라 오른 마당의 풀을 베기도 했다. 오후가 되어 일을 마칠 즈음이 되었을 때 두 사람은 모두 엉금엉금 기다시피 해야 했다. 동작 하나하나가 자유롭지 못했다.
돌아오기 위해 짐을 정리하고 잠시 마루에 앉아 쉬는데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60년 넘게 쓰는 연장이 무엇이 있을까 싶었다. 10년 쓰는 연장도 찾기 어려울 것이었다. 그런데 몸이라는 연장을 60여 년 써왔으니, 고단할 때도 된 셈이었다.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몸, 그런데도 60년을 넘게 쓰고 있으니 실로 대단한 일이었던 것이다. 고단함을 통해 깨닫는 고마움이 새삼스럽고 새로웠다. 아프다고 고단하다고 불평만 할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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