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얘기마을(8)
마른땅, 그대들의 땀방울은 약비로 내리고
살아가며 그중 어려운 건 외로움입니다. 얼마쯤은 낭만기로 들리는 그 말이 때론 얼음처럼 뼛속으로 파고들어 마음을 흐트러뜨리고 시간을 야위게 합니다.
농사일이 힘든 거야 당연한 일입니다. 변함없이 가는 세월 앞엔 한해 한해가 달라 기운이 쇠하고, 마음은 그렇질 않은데 몸이 따르질 못합니다. 맘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몸을 이끌고 예전처럼 농사일을 꾸리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갈수록 경운기 부리기도 겁이 나고, 쌀가마 두개쯤은 거뜬했던 지게질도 이젠 소꼴 얼마큼에 힘이 벅찹니다.
늙으면 손도 발도 따라 굼떠져 같은 일도 더딜 수밖엔 없습니다. 쑥쑥 단번에 뽑히던 잡초들도 이젠 우리들을 비웃어 여간한 힘엔 꿈쩍을 않습니다. 없는 새벽잠에 깨는 대로 일 나가면 더딘 일 얼마큼은 가릴 수가 있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대충 씻고 몸 생각해 한술 밥 뜨고 늦은 밤 자리에 누우면 일할 땐 몰랐던 통증이 몸 구석구석을 괴롭히지만 그 또한 이제쯤엔 익숙해진 일입니다. 기계도 되게 쓰면 고장 나고, 오래 쓰면 닳게 마련이니까요.
조상님들 애써 땀 흘려 물려주신 이 땅에 남아 농사를 짓다 때 되면 조상님 곁에 눕고 싶을 뿐, 일의 고됨을 원망하고 싶은 마음은 정말 없습니다.
그래도 때때로 어려운 게 외로움입니다. 기운 빠져 나가듯, 머리털 빠지듯 그런저런 쓸 데 없는 마음 없을 때도 됐는데, 그래도 외로움은 불시에 찾아오곤 합니다. 왜 우린들 젊은 자식들을 떠나보내고 싶었겠습니까. 기둥 같은 자식들을 떠나보내고 외다리로 선 듯 위태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겠습니까.
하지만 안 그럴 수가 없는 일입니다. 주저하는 자식들의 등을 반 강제로 떠다밀고, 저만치 손 흔들며 떠나가는 자식에게 안 그런 척 손을 따라 흔들지만, 그러고 돌아서면 왠지 모를 어지러움 온몸을 감돌고, 다 말라버려 없을 것 같던 눈물이 뜨겁게 솟구치곤 합니다.
모르던 담배도 배우고 술잔도 기울이며 이렇게 저렇게 마음을 딴 데 두려 하지만 그게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소쩍새 구성지게 우는 밤이면 재롱둥이 손주들 자꾸 눈에 밟히고, 번개 천둥 칠 때엔 자식들 걱정으로 밤잠을 설칩니다. 글눈을 뚫지도 못했으면서도 혹시나 문간에 매단 종이상자 편지함에 손을 넣어 보기도 합니다. 삶이란 게 이리 허하고 메마른 것인지, 그냥 자신에게 물을 뿐입니다.
젊은이들 용서하십시오. 늙은 것이 객소리를 길게 늘어놓았습니다. 요 며칠 고마웠습니다. 아픈 몸 만져주고 모자라는 일손도 도와주고, 이렇게 작고 외진 마을을 찾아와 수고까지 해주니 뭐라 이를 말이 없습니다. 며칠 있다 갈지 모르는 늙은 몸이기도 하거니와 이젠 웬만한 병엔 친구처럼 익숙해진 터이기도 합니다. 살다보면 싫어도 떠나보낼 수는 없는 친구가 더러는 있는 법이니까요.
아픈 다리를 절며 지팡이를 짚고 굳이 젊은이들을 찾은 것은 아픈 몸 뚝딱 일으키고 싶은 욕심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찾아온 그대들이 너무 고마워, 그 정성이 너무 감사해 주책없는 몸으로 찾았습니다.
그런 우릴 나무라지 않고 따뜻하게 맞아 아픈 곳을 어루만져 주고, 얼마나 고생하시냐 물어주니 더할 나위 없이 고맙습니다. 사실 몸도 한결 가벼워진 게 돌아갈 때 걸음은 올 때 걸음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욕하지 않는다면 한마디 보탤 말이 있는데 젊은이들 손길이 꼭 손주들 손길 같았습니다. 아릿한 기억으로밖엔 남아있지 않은 손주들의 손길에 대한 그리움이 그대들 손길들을 통하여 되살아 왔습니다. 참 그리운 기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젊은이들이 곱고 하얀 손으로 풀을 뽑고 피를 뽑을 땐, 손 시커멓게 담배 순을 딸 땐, 그러면서 벌겋게 손등이 물들어 갈 땐 애처롭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 일시키는 우리가 죄 짓는 것 같았습니다. 내리는 비를 그냥 맞으면서도 일손을 멈추지 않았을 땐 바라보는 마음까지 뜨거워져 흉이 아니라면 한 번씩 껴안아주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습니다. 약비였었죠. 말라가던 곡식들이 춤을 출 땐 비를 맞는 우리들의 마음도 따라 춤을 추고 싶은 지경이었습니다. 얼마 만에 열린 하늘이었던 지요. 밤에 누워 가만 생각하니 내린 비가 그냥 내린 비는 아니었습니다.
젊은이들 이곳 단강을 찾아 흘린 방울방울 땀방울들, 그게 하늘로 올라가 비로 내렸지 싶었습니다. 아니 분명 그랬을 겁니다. 온몸으로 맞은 비가 젊은이들 흘린 땀방울이려니 생각하니 두 눈이 뜨거웠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온몸이 졸아드는 것 같았습니다.
구애련 교수님의 기도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더듬더듬 말씀은 느렸지만 비 좀 내려 주셔서 농민들의 마음을 위로해 달라시는 기도를 드릴 때, 우리의 마음은 누군가 강한 이가 손을 잡아주는 것처럼 큰 위로를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교수님의 간절한 기도도 단비로 섞였으리라 생각합니다. 먼 나라의 할머니가 이곳 단강까지 와서 우리를 만나고 있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했습니다.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많았으리라 여겨집니다. 농사지으며 무지랭이로 살아가는 우리들로서야 모르는 것이 많기에 들어야 할 것이 많습니다. 하고 싶었으나 하지 않고 돌아서는 젊은이들 마음속의 이야기를 오히려 우리는 더욱 크게 듣습니다. 그 침묵이 무얼 의미하는 지도 어렴풋 헤아릴 수 있습니다. 적은 시간 속에 싹튼 서로의 정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통하게 하는 귀한 길 하나를 우리 사이에 만들어 주었으니까요.
백로와 왜가리 한가하게 나는 마을에 헤프게 널린 아픔과 아픔을 사랑으로 안으려는 젊은이들의 안쓰러운 표정을 우리도 고마움으로 헤아릴 수가 있었답니다.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입니다. 헤어짐의 자리는 늘 어렵습니다. 수고하고 떠나가는 젊은이들의 마음속에 아쉬움 얼마일지 모르나 보내는 우리들의 마음이 쉽지를 않습니다.
젊은이들의 땀이 섞여 더욱 비옥해졌을 땅에 곡식이 익을 때쯤 편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단강에 오십시오. 햇곡식을 찧어 떡도 하고 음식도 차려 함께 흘린 땀의 결실을 기쁨으로 나누고 싶습니다. 젊은이들이 흘리는 귀한 땀방울들로 하여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전해준 따뜻한 정을 마음깊이 새깁니다. 고맙습니다.
1992년 7월 11일 단강리 주민을 대신하여
(연세대 원주의대 재활의학과 학생들의 농활을 마치던 날, 뒤풀이 시간에 읽었던 글입니다.)
<얘기마을>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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