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얘기마을(9)
뒤풀이
은진이 아버지가 노래 부르는 모습을 전에 본 적이 없다. 한 동네서 6년을 같이 살아오면서도 말 한마디 속 시원히 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는 터에 노래라니. 은진이 아버지의 노래는 나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게다가 흥이 더하자 덩실덩실 청하지도 않은 춤마저 추는 것이 아닌가. 이거 내가 꿈을 꾸나 싶었다.
박수와 웃음소리, 그리고 환호소리가 노래와 춤을 덮었다. 일주일 동안의 농촌봉사활동을 마치고 마지막 날 저녁 예배당 마당에서 열린 '마을주민잔치', 이른바 뒤풀이 시간이다. 자리를 깔고 천막을 치고 푸짐한 상을 차리고, 그야말로 신명나는 잔치가 열렸다.
모르는 대학생들이 일주일 동안이나 단강을 찾아 귀한 땀을 흘리다니, 농약을 치다 어지럼증을 느끼면서도, 풀독이 뻘겋게 오르면서도, 거머리에 물리면서도,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아가면서도, 일마치고 밤늦게 찾아와도 싫은 표정 없이 아픈 곳 어루만져 주면서 일주일을, 꿈같은 일주일을 보냈다.
이젠 정리하는 시간, 마음에서 비롯된 서로에 대한 고마움이 진하게 풀려나와 하나로 엉기고 있었다. 이처럼 고마울 데가 있냐며 더 할 말을 모르겠다던 반장님의 인사, 여러분들이 흘린 땀으로 더 좋은 세상 왔으면 좋겠다고 두 내외가 큰 정성으로 준비한 기념 수건을 전하며 울먹였던 유보비 집사님, 정보인 교수님의 예쁜 노래, 새댁 아주머니의 ‘쪼루쪼루’ 노래와 학생들도 못 따라 온 멋진 춤, 노래하며 떨어본 적 없는데 오늘은 왜 이리 떨리냐며 그래도 기꺼이 노래 두 곡을 부른 종대 어머니, 학생들에게 단강을 소개한 유재흥 선생의 힘찬 노래, 광철 씨의 타령, 무엇보다 맘 놓고 기뻐한 학생들, 그들의 어리광스런 즐거움, 아름답고 믿음직한 젊음, 그날 난 '마른 땅, 그대들의 땀방울은 약비로 내리고'란 글을 읽으며 울고 말았다. 애써 마음을 누르고 글을 읽어 나가다 “햇곡식을 찧어 떡도 하고 음식도 차려 함께 흘린 땀의 결실을 기쁨으로 나누고 싶습니다.”를 읽을 때 나도 몰래 뜨거운 눈물이 솟고 말았다.
몇 명 왔느냐, 책임자가 누구냐, 누구네 일 갔느냐, 몇 평 일했느냐, 창피한 것도 모르고 감시차 전화나 걸어대는 이들은 전혀 알지도 생각지도 못할 멋진 시간이 강물처럼 깊은 밤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얘기마을>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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