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얘기마을(53)
살아도 안 산
“그냥 살다 죽지 이제 살리긴 뭘 살려, 세금만 더 낼 텐데.”
치화 씨 어머니는 호적이 없습니다. 십여 년 전 주민등록이 말소되었기 때문입니다. 남편의 죽음 이후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 치화 씨 어머니도 부산 어디 수용소에 갇히는 등 정처 없는 떠돌이 생활을 했던 것인데 그러는 사이 주민등록이 말소되었던 것입니다. 마을 사람 몇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 호적 이야기가 나왔고 이야기의 대부분은 까짓것 그냥 살다 죽지 뭘 하러 죽은 호적을 살리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십년 넘어 만에 아들 치화 씨를 만나 기구한 삶 오늘에 이어오지만 그렇게 살아도 이 세상 안 산 걸로 돼 있는 치화 씨 어머니. 언제 한 번 생이 따뜻이 그를 맞아줘 살 듯 산 적 있었겠냐만, 살아도 안 산, 속해도 벗어나 잊힌 생이 되고 만 치화 씨 어머니.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이 저린 건 우리 생은 어디에 속해 있는 것인지, 내 삶을 살았다 증명해주는 게 주민등록뿐이라면, 그 하나가 우리 생의 유일한 증명이라면, 그건 결국 큰 허울 아닌가 싶은 것이었습니다.
살아도 안 산 걸로 돼 있는 치화 씨 어머니 이야기를 들으며, 난 수없는 우리들 이야기를 같이 들었습니다.
-<얘기마을>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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