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숙의 글밭(216)
순한 풀벌레 소리
새벽녘 풀벌레 소리가 귀를 순하게 합니다. 잠에서 깨어난 후 들려오는 첫소리가 풀벌레 소리라는 사실에 문득 이 땅을 살아가면서 이보다 더 큰 복을 누릴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자연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는 잠자던 영혼을 깨우고 길 잃은 영혼을 부르는 태초의 종소리 같습니다. 자연의 초대는 언제나 내면의 산책길로 향해 있습니다.
잠시 앉아 있으니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따스하게 차오르는 감사와 고요의 샘물이 출렁입니다. 가슴에 흐르는 지금 이 순간의 출렁임은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픈 일어남이 아닌, 지금 이 순간만으로도 이미 충만해서 더 오래 머물고픈 고요함입니다.
제겐 이런 고요의 샘물과 침묵의 열매를 나누고픈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잘 익은 무화과 열매를 맛보면서 그리운 얼굴들이 떠오르는 것처럼 그렇게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물질이 줄 수도 없고, 물질로 채울 수도 없는 이 내면의 하늘은, 멈추어 고요한 호흡과 침묵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내면의 산책길에 만나는 언제나 푸르게 펼쳐진 하늘입니다. 그리고 거기엔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빈탕한 하늘이지만 충만합니다.
사람에게서 언뜻 맑은 하늘이 보이는 순간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내면에 고독과 침묵의 고요한 하늘을 지닌 자에게선 그와 같은 맑은 하늘 향기가 전해져 오는 것입니다. 시로 만난 윤동주의 밝고 맑은 하늘빛이 또한 그렇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윤동주의 '둘 다'라는 시는 1937년이 되던 해 그의 나이 스무 살에 지은 시입니다.
둘 다 - 윤동주 詩
...
바다도 푸르고
하늘도 푸르고
바다도 끝없고
하늘도 끝없고
바다에 돌 던지고
하늘에 침 뱉고
바다는 벙글
하늘은 잠잠
요즘처럼 어려울 때일 수록 일상을 살아가다가 틈틈이 멈추어 홀로 고요와 침묵으로 침잠함으로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이 난장판인 세상의 흐름 한 복판에서도 숨을 쉴 수 있는 비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엄마 뱃속에 홀로 있던 기억 저편의 고독과 침묵의 시간입니다. 사랑을 씨알처럼 품은 관상(觀想)의 기도 속에서 영혼과 마음과 몸이 다시 회복되고 새로운 힘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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