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숙의 글밭(212)
볼펜 한 자루의 대한독립
외국에 있는 벗에게 보낼 선물을 고르는 일에는 이왕이면 한국산을 고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먼 타향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고국에서 온 것이라면 더 소중하고, 때론 작고 보잘 것 없는 작은 선물 하나가 마중물이 되어서, 마치 고향의 산과 들을 본 듯 그만큼 반가울 수도 있는 일이다.
멀리 있기에 아름다운 달과 별처럼 작고 단순한 물건이 그리운 제 나라의 얼굴이 되고 체온이 될 수도 있기에, 좋은 한국산 볼펜과 잉크펜을 찾기로 했다. 북쪽 나라에 부치던 윤동주의 귀여운 조개껍질처럼, '울언니 바닷가에서 주워온 조개껍질'에서 물소리 바닷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일이다.
한동안 찾았으나 좋은 한국산 볼펜과 잉크펜을 고르는 일이 순조롭지 못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평소에 잉크펜으로 공책 필기를 하는 나부터도 현재는 일본 제품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년에는 일부러 모나미 제품의 볼펜으로 장시간 필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오른쪽 어깨와 팔에 힘이 많이 들어가는 걸 느낀 후 술술 잘 써지고 팔에 무리가 덜한 제품을 고르게 된 것이다.
공책 필기를 좋아하는 딸아이도 이것저것 써 본 후 자기한테 맞는 볼펜이나 잉크펜 한 자루를 사기 위해서 일부러 멀리 시내에 있는 문구점을 찾아가는 모습을 볼 때면, 마치 목마른 자가 우물을 찾아가는 모습 만큼이나 간절해 보이기까지 한다. 끝내 딸아이가 선호한 잉크펜도 일본 제품이라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우선 문구점에 많이 진열되어 있어서 손쉽게 구할 수 있고 품질도 좋은 필기구가 대부분 일본 제품이라는 사실이 우연은 아닌 것 같다. 동아, 모나미에서 나온 볼펜과 잉크펜을 고르려면 어디 구석진 자리에 겨우 몇 자루 있을 뿐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하는 생각을 그칠 수가 없고, 그쳐서도 안되며, 땅속으로 뿌리를 내리는 나무처럼, 이 땅을 유유히 흐르는 냇물처럼 이어져 나아가야 하는 생각의 길이다.
어제는 바른손 문구에서 한글로 제품명 표기가 된 잉크펜을 한참을 골랐다. 그리고 지난주에는 기대하고 일부러 찾아간 부산대학교 앞에 있는 모닝글로리, 거기서도 마땅한 한글명 한국산 잉크펜을 구하지 못하고 시간만 보내다가 온 적이 있다. 그보다 한 달 전에는 울산에 있는 구암문구와 교보문고에서도 사실은 허탕을 치기도 했었다.
한글이 적힌 품질이 좋은 한국산 볼펜과 잉크펜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길이 이렇게 쉬운 길이 아니라는 현실이 답답하게 다가온다. 혹시 찾아내지 못한 것이 나의 부족함일 수도 있기에, 좋은 국산 볼펜이나 잉크펜을 알고 계신 분이 계시다면 알려 주시면 좋겠다.
오늘이 대한독립을 맞이하는 75주년이 되는 날이다. 하지만 이렇게 나부터 볼펜 한 자루에서도 대한독립을 맞이하지 못한 현실은 여전히 스스로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알아주지 않아도 어딘가에선 국산 제품의 품질 개선을 위한 연구와 노력이 이어지고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여전히 품고 있다.
그리고 동네와 학교 앞 문구점 진열대에서도 학생들이 품질 좋은 한국산 볼펜과 필기구를 보다 손쉽게 선택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볼펜 한 자루의 대한독립은 나부터 시작해야 하는 첫걸음인 것이다. 품질 좋은 한국산 제품의 필기구를 찾아가는 여정은 참된 길을 찾아가는 순례길과 다르지 않다. 어쩌면 강압적으로 길들여진 노예 의식에서 벗어나서, 제 두 발로 서는 주인이 되는 길인지도 모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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