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숙의 글밭/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

엎드려 우러러보는 꽃처럼 - <시편사색>을 읽다가

by 한종호 2020. 8. 31.

신동숙의 글밭(223)


엎드려 우러러보는 꽃처럼 - <시편사색>을 읽다가


<시편 사색>을 읽다가, 신앙인의 참된 자세를 비추어 볼 수 있는 아름답고 조화로운 문장을 만나게 되어 반갑고 고마운 마음으로 이 글을 적는다. 마음 한 켠으로는 필자의 짧은 소견이 덧붙여져 오히려 문장의 본뜻을 가리게 되는 폐를 끼치진 않을까 조심스러운 마음이다. 


히브리 시인의 시편 16편 6절 -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를 두고서, <시편사색>의 오경웅 시인은 '님 주신 유업을 누리는 중에 엎드리고 우러르며 님의 뜻 헤아리네' - 優游田園中 俯仰稱心意 (우유전원중 부앙칭심의)로 해설하였다. <시편 사색> 송대선 역자의 해설 전문을 그대로 옮기자면, 


'히브리 시인은 주님이 허락하신 유업에 즐거워하지만 오경웅은 그 유업을 누리면서 주님의 뜻을 겸손히 헤아려본다. 이를 부앙(俯仰) 즉 '엎드려 우러른다'고 표현하였다. 신앙의 참된 자세이다. 주님을 우러를 수밖에 없으니 앙(仰-우러를 앙)이되 동시에 엎드려 자신을 돌이켜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부(俯-엎드릴 부)이다. 엎드림 없는 우러름은 자신을 잊는 공중누각이요. 우러름 없는 자기 살핌은 절망의 나락이다. 히브리 시편에서 뽑아내는 오경웅 시인의 눈매가 고맙다.'(<시편 사색> 104쪽, 오경웅 지음, 송대선 옮김·해설, 꽃자리)


송대선 역자의 말처럼 오경웅 시인의 눈매가 고맙고, 그 눈매를 알아본 역자의 눈매가 더불어 고마운 것이다. 오늘날 개신교회가 잊고 지내온 하나의 눈매가 바로 이 '엎드림'이 아닌가 하는데 생각이 닿는다. 흔히 '엎드림'을 두고 우상에게 절을 하는 행위적 의미로만 치부해 버린 오류를 그동안 범한 건 아닌지 스스로를 되돌아본다. 



그 옛날 일본 천황에게 단순히 몸을 굽히는 신사참배 만큼은 하지 않았다는 이유와, 조상의 제삿상에 몸을 굽혀 절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와, 사찰이나 집에서 드리는 108참회의 절(108배)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두고, 몸을 낮추어 엎드리는 행위 자체를 단순히 우상 숭배라 치부해 버린 채, 지금껏 개신교회는 우상 숭배를 하지 않았다며 스스로 자랑의 말을 일삼아 온, 어느 일부 개신교 정통 종파가 지금껏 보인 모습은, 그보다 더한 우상 숭배인 마음의 아상과 교만과 물질의 탐욕으로, 세상의 상식을 등진채 쌓아온 것은 대형 성벽이 아닌가? 성경의 본뜻을 표면적 의미로 잘못 해석하는 오류를 나부터도 얼마나 많이 범하고 있을까!


성경을 읽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른길은 예수와 하느님의 본뜻을 알아차리는 길이 아닌가? 그 길이 말씀 묵상과 기도의 길이라면, 바깥에서 누군가 대신 풀어주는 해석은 어디까지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참고서로 삼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인 마음속 성령 즉 이미 자기 안에 있는 양심의 하늘에,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비추어 보는 말씀 묵상과 관상의 기도를 통해서, 비로소 하느님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하나로 일치 될 수 있는 온전한 길 투명한 길. 그 길로 나아가는 걸음마다 날숨마다 엎드려 하늘을 우러르는 길이 바른길이 아닌가 하고 헤아려본다. 


엎드림의 첫걸음이란, 토머스 머튼의 표현을 빌려 자기를 깨끗이 하는 자기 정화(淨化)와 동양적 사유에 바탕을 둔 오경웅 시인의 자신을 닦는 수신(修身)의 깨어있는 깨달음의 길에 기대어 풀어보려고 한다. 도덕과 사회 윤리를 저버린 종교인의 맹목적 맹신적 믿음으로 과연 참된 신앙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단지 사도 바울이 말하는 십자가의 대속만이 우리를 구원해 줄 예수가 말한 좁은길인가? 


필자가 신약에서 본 예수의 복음은 예수가 공생애의 처음부터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강조한 것은 보이지 않는 마음이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오르시던 마지막 순간까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신 선물은 십자가가 아닌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성령 곧 양심이다. 거듭 생각해 보아야 하는 일이다. 그렇다고 종교와 신앙 생활이 곧 윤리 생활은 아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도덕과 윤리를 저버린 종교인의 허황되고 불투명한 말들이 이 세상의 질서와 우리의 이해를 그동안 얼마나 많이 어지럽히고 있었던가? 


심지어 안타깝게도 때로는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종교 생활로 인해 가까운 사람들이 예수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 스스로가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던가? 적어도 우리는 나약하기에 누구든 잘못을 저지를 수는 있지만, 이어서 거듭 참회와 회심의 투명한 길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당장에 자신의 죄를 덮고자 손바닥으로 하늘의 뜻을 가려선 안되는 것이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마음을 지키라고 하신 하느님과 예수가 그토록 강조한 것이 마음이기에, 무릇 그 마음을 깨끗이 정화하고 자신을 닦고 자기를 비우는 첫걸음인 도덕과 윤리의 맑은 길이, 나아가 '마음이 깨끗한 자가 하느님을 볼 것임이오.'라고 했던 하느님을 알아가는 깨달음의 첫걸음이 아니겠는가? 개신교회의 첫걸음이 그런 맑은 걸음일 수 있을 때, 얼마나 많은 깨어있는 이들이 그 맑은 걸음을 통해 기꺼이 그 길을 따르고자 할 것인가. 


물론 그 길을 묵묵히 걸으며 예수의 뒤를 따르는 신앙인을 개신교 안에서도 투명한 하늘처럼 더러는 보았기에 필자가 여전히 세상을 향해 예수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나에게 있어 예수가 보여준 사랑의 마음은 이미 종교를 초월해서 가장 온전한 빛과 진리와 생명이 된다. 예배당 건물과 교리의 틀 속에 가두어 놓기엔 자유이신 하늘은 광활하기만 하다. 


자기의 몸과 마음을 겸손히 낮추어 마지막 숨까지 내어놓는 엎드림은 그대로 자기 비움의 길이다. 하늘의 뜻이 임재하는 땅 즉 내 몸과 마음이 거룩한 성전이 되는 길이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가복음 9장 23절)


윤동주 시인의 서시(序詩)에 나오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에서 하늘을 우러르는 얼굴이, 진리의 하늘로 향하는 진실의 나뭇가지와 줄기와 꽃의 마음이라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에서 볼 수 있는 숨결은, 엎드려 그 만큼 낮아지고 작아져 땅을 끌어안고서 안으로 자기를 성찰하며, 이어서 마지막 한숨까지 텅빈 비움으로 투명해진 양심의 하늘에 비추어, 주님의 뜻을 겸손히 헤아리려는 나무뿌리의 마음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알아주는 이 아무도 없어도 홀로 골방에서 진리와 자기의 양심(성령)을 등불 삼고서, 자기 안으로 고요히 침잠하는 말씀 묵상과 관상 기도의 뿌리내림이 곧 엎드림의 길이 되고, 엎드림으로 자기를 비운 날숨 만큼 저절로 채워질 하늘의 들숨을 우러르는 길이 예수의 좁은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길, 즉 마음의 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본다.


뿌리내리지 않고 피어나는 꽃이 어디 있던가.

피어나는 모든 생명은 제 가슴으로 뿌리를 내린다.

엎드려 자기 숨을 다 비우며 땅을 끌어안는 뿌리처럼,

뿌리를 깊이 내릴수록 높이 자라나는 줄기와 저절로 채워지는 하늘 숨으로 피어나는 꽃처럼,

땅으로 엎드려 하늘을 우러르는 꽃과 나무처럼,

나를 비워 그대로 하늘이 드러나게 하는 투명한 길.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