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숙의 글밭(220)
안거(安居), 안전 수칙이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
손톱 끝에 초승달인가 싶더니 성실한 달이 오늘은 하얀 반달로 떴다.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은, 하늘과 땅을 꿰뚫는, 가운데 중(中)의 한 획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반쪽이 있음으로 인해서 보이지 않는 나머지 반쪽을 헤아리려 저절로 아득해지는 마음은 보름달 만큼이나 사람의 마음을 넉넉하게 만든다.
이 순간 하얀 반달처럼 눈이 맑은 벗이 곁에 있다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픈 아니 서로가 아무 말없이 저 달을 바라보며 고요히 앉아 있기만 해도 좋을 귀뚜라미 소리 순하게 들려오는 여름밤이다.
깨어 있는 낮의 하루와 조금 있으면 잠자리에 들 나머지 반쪽의 하루, 그 사이 어디쯤에 이렇게 머물러 있는 교차의 시간은 왠지 나그네의 마음을 쓸쓸하게도 하지만 아득히 고요함으로 이끈다.
연일 들려오는 세상 소식에 귀를 열어놓고 있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다시 재확산세로 접어든 코로나19 안전 수칙을 두고서, 종교 자유의 침해라는 그릇된 해석으로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일부 개신교회 측의 교회건물 대면 예배 주장을 보면서, 아무리 얘기해도 소 귀에 경 읽기처럼 콘크리트 건물벽에다 대고 얘기하는 것만 같다. 무엇이 똑같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불통의 벽을 세웠는가?
이제껏 지켜본 코로나19 안전 수칙은 우리 모두의 생명을 지켜줄 최선의 지혜라는 생각이 더욱 든다. 적어도 코로나19 재확산이 터지기 직전까지, 그동안 저마다 지켜온 안전 수칙 준수 안에서 비교적 평범한 일상의 자유를 누려올 수 있었다. 그러하기에 앞으로도 이 바이러스와 수해와 이어지는 위기 속을 함께 지나가는, 오늘날 우리 모두의 생명을 지켜줄 올바른 길이, 곧 코로나19 안전 수칙이라는 생각이 여전한 것이다.
이처럼 변화된 일상 생활의 소소한 규칙들로 저마다 크고 작은 답답증을 느끼고 있는 우리들과는 달리, 아무렇지도 않게 여전히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봉쇄 수도원의 수도승들과 큰 절과 암자, 토굴에서 하안거 중인 수도승들일 것이다. 그리고 흙을 일구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선한 농부들의 삶도 진리에 가까운 것이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수도승들이다. 손수 땅을 일구고 씨를 뿌려 농사를 짓고, 옷과 도구 등 최소한의 검소한 생활 필수품들은 손수 자급자족하는 삶, 그것은 수행처의 오랜 전통으로 수도원과 절 안에서 행하는 모든 일과 공부와 일상 생활은 그대로 구도자의 기도와 수행으로 이어진다.
반면에 처음부터 도심에 자리한 개신교회들은 흙과 농사와 자급자족의 삶에서 멀어진지 오래다. 자본주의 경제체제 안에서 함께 성장해 오며, 자본의 고리 안에서 순환하는 삶은 점점 더 자연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자연과 동떨어진 진리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자연이란 곧 우리의 마음을 진리로 이어주는 가장 커다란 경전이기 때문이다.
사막과 산을 떠난 예수를 상상할 수 없고, 보리수 나무를 떠난 석가모니를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오늘 당신이 빌딩숲 사이로 난 밤길을 홀로 걷다가 문득 불어오는 밤바람에 밤하늘을 우러러보며 달과 별을 찾으려는 시시한 마음이 일거나, 작은 풀꽃을 무심코 발견하고는 한없이 낮아지고 작아진 이슬 한 방울처럼 겸허히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 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역시 도심 속에 살더라도 이미 자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삶이리라.
마스크 속의 침묵과 손씻기의 청결, 사람과 거리 두기의 고독과 기침처럼 작은 것 하나라도 살아 있는 모든 생명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조심하는, 그 모든 일련의 깨어 있는 행함은 그대로 깨어 있는 구도자의 삶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재택 근무와 온라인 등교 등 가급적 집안에 머물기를 권고하는 고립의 생활은 수도승들의 안거(安居)와 닮았다.
안거란 어쩌면 우리들이 그동안 까마득히 잊고 지내던 마음챙김과 비로소 영혼에 깃드는 삶인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경제체제 안에서의 삶은 사람을 기계의 부속품에 가깝게 만들어 놓았다. 밤이고 낮이고 도시가 돌아가기 위해선 바쁘게 움직여 자리를 메꾸어줄 부속품이 언제나 필요한 것이다. 하루를 바쁘게 움직여 삶을 꾸리고 정신없이 돌아가지 않으면, 한낱 게으름으로 치부해 버리려는 인간에 대한 그릇된 이해가 상식이 된지 오래다.
일명 멍때리는 시간의 고요는 명상과 관상의 기도로 이어지는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한시도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치 못하는 우리 자녀들에게서 앗아간 보물이 바로 심심함과 멍한 일상 너머의 시간, 곧 텅빈 시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텅빈 시간은 하늘로 열려 있다.
하지만 그러한 숨 가쁜 흐름 속에서도 사람의 본성은 자신도 모르게 주말이면 도심 속 일상의 테두리를 벗어나 산과 바다를 찾게 한다. 그 잠깐의 홀가분한 벗어남을 조금 더 길어진 수도승들의 안거에 비추어 보는 것이다. 그 안거를 가장 오래한 수도승으로 성철 스님의 대구 파계사 동구불출 십 년이 정점을 찍었다. 거기로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타락의 정점을 찍었던 한국의 불교는 청정 수행도량으로서 부활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코로나19로 인한 위기 속을 함께 지나며, 안전 수칙 준수와 더불어 집안에 머무는 개개인의 안거 속에서, 자신의 내면으로 깊어짐으로, 다시금 깨어날 한국 개신교회의 희망을 그려본다. 한 영혼의 깨어남은 온 법계를 두루 평화롭게 하리라는 염원을 품어본다.
수도승들이 안거 중에 행하는 수행자의 삶이란, 명상 또는 참선과 경전 읽기가 대표적이라고 한다. 개신교에선 성경, 지혜서 읽기와 묵상과 기도라고 할 수 있겠다. 바깥으로 향하던 삶으로부터 안으로 시선을 거두어 홀로 깊어지는 것이다. 하늘과 땅을 꿰뚫는 가슴의 중심에 닿기 위한 기도와 진리의 삶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다.
어려움 중에도 생계를 책임져야 할 자녀가 있고, 남편이 아내가 나이 드신 부모가 세상의 뉴스가 틈틈이 우리의 주의를 흐트려 놓는 와중에도, 이전의 삶보다 가급적 홀로 머물며 안으로 깊어지는 것이다. 비로소 내면의 하늘에 뜨는 달과 별과 해를 보기를 원하는 빈 마음이, 안전 수칙 준수 안에서 누리는 자유다. 또한 저마다 고요해진 가슴이 시키는 일이 있다면, 언젠가 낮아진 가슴에 밤바람처럼 지나던 성령이 떨구어준 소망의 씨앗이 움 트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안거 중에 할 수 있는 일들을 가만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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