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숙의 글밭(221)
의료 파업, 의료진들도 아프다
나 자신도 육아 파업과 주부 파업을 하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육아의 가장 큰 적은 경제력의 빈곤도 아니고 무능력도 아닌, 그 어떤 것보다 '엄마의 피로'라는 말을 실감하곤 한다. 피로하면 만사가 다 귀찮고 힘든 것이다. 사랑하고 안아 주어야 할 귀한 제 자식이라도 밀어내고 싶고 내려놓고 싶은 심정이 들면서 무거운 짐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때가 있다.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겪어 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파업을 하는 의료진들의 몸과 마음이 그러한 상태까지 간 것인가?
처음엔 사소하고 가볍게 찾아온 피로감이 해소되지 못해 점점 쌓여만 가고, 과중된 업무에 스트레스까지 쌓이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몸과 마음의 면역체계는 무너져 내지기 시작하는 것이 순리다. 하느님도 6일 동안 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 7일째 되는 날 안식일을 가지신 이유를 가만히 마음으로 헤아려 본다. 이 하루 동안에도 낮이 가고 밤이 오면 하늘의 큰 빛을 거두시고, 달과 별로 작은 등불을 켜두시는 어진 손길로, 우리의 눈을 감기우며 평온한 잠을 선물로 주시는 뜻을 헤아리다 보면, 휴식의 의미가 생명의 뜻으로 읽힌다.
자연스러운 삶은 자연의 리듬과 순리에 따르는 삶일 것이다. 하지만 아픈 환자를 돌보는 병원이란 곳은 교대 근무이긴 해도 밤에도 불을 다 끄지 못한다. 마치 어둔 밤바다를 지키는 등대지기처럼, 홀로 외로운 의료진들이 아픈 이들을 지키고 있는 곳이 병원 안의 삶인 것이다. 그동안 안전 수칙 준수 안에서만 제 역할을 다한 듯, 정작 코로나19의 모든 뒷감당과 책임과 의무를 의료진들에게만 떠넘기고서 우리 사회가 다소 무책임하고 무관심했던 건 아닌지 나 개인이 있는 자리부터 스스로 되돌아보게 된다.
의료 파업, 119 구급차로 이송되던 환자를 받아줄 병원 응급실을 찾느라 이곳저곳으로 다급하게 연락을 취했을 구급대원의 애타던 심정이 끝내 꺼져버린 장작불에 피어오르는 향불이 되고 만 일이 일어난 것이다. 세 군데 병원이 응급실 문을 닫은 것이다. 그렇다면 문을 닫아건 병원 건물 안에는 누가 있었다는 말인가? 누군가 전화는 받았다는 얘긴데, 하지만 이러한 헤아림 조차도 이제는 아프기만 하다. 책임 추궁의 화살은 내 안에 빈 하늘을 먼저 날아서 지나가는 법이다.
오죽하면 병원 응급실 문을 닫아 걸었을까 싶은 것이다. 그들의 고충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의료진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거듭 마음을 모으며 나 자신의 삶에 비추어 헤아려 보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제 가슴을 찌르는 한 생각에 가 닿는다. 의료진들도 아픈 것이다. 아주 가끔은 육아 파업과 주부 파업을 하고 싶던 나 자신의 힘겹던 상황과 겹쳐지면서 그들을 향해 닫아건 마음의 문이 한가닥 열리며 한줄기 빛이 들어오는 것이다.
그들에게도 안식과 위로가 간절했던 건 아닌지. 2월 경 신천지로부터 시작된 코로나19 위기 상황을 이 만큼이라도 이겨낼 수 있었던 최전선에는 언제나 한국의 의료진들이 있었다는 고마운 사실을 우리는 잊어선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맨몸으로 달려간 그들에게 주어진 보상이라곤 한 지역에선 밀린 월세였고, 이제는 전국적으로 2차 코로나19 재확산이라는 과중된 업무 뿐이다.
이렇게 지치고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의료진들에게 있어 파업이란 어쩌면 그동안 의료 방호복 안에 갇혀 보이지 않게 저 혼자 끙끙 앓았을 환자의 비명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들도 누군가의 금쪽 같은 자녀이며 사랑하는 어미이며 아비이며, 아플 수도 있고, 하느님처럼 안식일을 누릴 수 있는 생명을 지닌 사람인 것이다. 순수하던 어린 시절의 꿈에 의료진이 되겠다는 소망을 품었을 그 순결한 첫마음을 샘물처럼 기억해 주고 싶은 마음이다.
인간의 우둔함을 그 옛날 성경에서 보았다. 하느님에게 자신들의 왕을 세워 달라며 떼를 쓰던 유대인들에게 하느님이 하시던 말씀이 지금까지도 걸림돌이 되어서 내 발길에 채이고 있는 것이다. 왕을 세워 달라 떼를 쓰던 유대인들에게 하느님의 답변이란, 왕은 너희들에게 아무 필요가 없을 텐데, 왕을 세우면 너희들의 가장 좋은 것으로 주어야 할 텐데.
골목길에 뒹구는 강아지똥도 쓸모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왕은 아무 쓸모가 없을 거라는 말씀을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우격다짐으로 왕을 세워 달라 요구하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들의 뜻대로 하느님은 이스라엘 민족 최초의 왕을 세워 주셨다. 그가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외치는 자 전**의 시조가 되는지도 모르는, 사고도 많고 탈도 많던 사울왕이다.
오늘날에도 우리들의 시선은 바깥 세상을 향하여 자기의 왕이 되어 달라고 자꾸만 떼를 쓰고 있다. 구세주를 원한다. 그래놓고는 그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만 한다. 내 삶을 풍요롭게 이끌어 줄 정치의 구세주, 만병을 치유해 줄 의료의 구세주,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해 줄 종교의 구세주, 무엇이든 내 손 안에서 나의 욕구를 무한으로 들어줄 손바닥 안의 구세주인 스마트폰은 이제는 거꾸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왕이 되어 가고 있다. 우리는 그 편리함의 감옥에 갇혀 점점 스마트폰의 노예가 되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우리는 책임감의 화살을 바깥으로만 쏘아대고 있다. 사랑과 책임의 화살끝은 언제나 자기 안으로 자신의 가슴으로 향해야 하는 법이다. 우리에게 진리의 영인 성령 즉 양심을 선물로 주고 가신, 진리의 몸이 된 예수가 보여준 좁은문으로 들어가는 좁은길이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사 자유의지를 주시며, 노예가 아닌 사랑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셨다. 저마다 지닌 몸과 마음의 성전이, 비로소 하늘의 뜻이 임재할 거룩한 땅이 되는, 자유와 사랑을 하느님은 지금도 원하고 계시는지도 모른다. 예수님도 나중에는 제자들에게 나의 벗이라 부르셨다.
내가 본 예수와 부처의 손가락이 한결같이 가리킨 곳은 마음이다. 하느님도 무릇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마음을 지키라고 하였듯, 마음인 것이다. 예수와 부처의 모든 말씀은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안내문과 이정표와 참고서가 된다. 구세주를 만나는 길은 이미 내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 보편적이고 공평하게 심어 주신 영성, 불성, 본성, 참자아, 얼나, 성령, 양심, 진리의 씨앗.
한결같은 진리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땅은 자비와 긍휼의 땅, 모든 생명을 향한 사랑의 책임감이 지구의 뿌리이다. 모든 생명을 품으려는 우주적인 책임감이다. 우리가 의료진에게 바랬던 건 어쩌면 구세주의 우주적인 책임감이 아니었던가 싶은 무거운 생각까지 이어지다 보니 머릿속이 아찔해지면서 반성이 된다. 책임감의 화살끝은 언제나 나 자신 안으로만 향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이 길은 그 뒤를 따르는 자가 걸어가야 할 예수가 보여준 진리의 길이기에... 이제는 돌이킬 수도 없기에.
오늘 내가 앉은 자리에서 바로 세워야 할 것은 너가 아니고 나인 것이다. 우리의 왕이 되어 달라 떼쓰던 어리석은 백성들이 원하던 정치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와 의료진이 아니라 바로 세워야 할 것은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 저마다 제 두 발로 서서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품고서 안으로 우주적인 사랑의 책임감에 뿌리를 내림으로 꽃을 피워야 하는 자리는 바로 평화의 땅인 나 자신, 저마다 자신의 앉은 자리에서 자기만의 꽃을 피울 꽃자리인 것이다.
이미 내 가슴 가장 깊숙히 심겨져 있는 가장 아름답고 온전한 양심은 피워내야 할 꽃의 씨앗이 된다. 그렇게 모두가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자기 안으로 낮아져 사랑의 책임감에 뿌리를 내릴 때, 더불어 모든 생명은 숨을 쉬고, 세상은 기뻐하며 조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을 보게 될 것이기에. 떠들었더니 입이 아닌 어깨가 아프다. 그리고 마음이 더 아픈 날이다. 오늘도 강변에 피어나는 성실한 벗 들꽃들을 바라보면서, 지금 그 누구보다 마음이 무겁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의료진들의 온전한 마음의 회복과 건강과 평화를 빌며 기도하는 저물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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