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얘기마을(77)
그리운 햇살
가물어 물을 대던 기다란 호스가 곳곳에 그대로인데 이번엔 물난리다. 그칠 줄 모르는 빗속에 삽을 들고 물꼬 트는 손길들이 분주하다.
“비도 좀 어지간히 와야지. 밤새 빗소리에 한잠도 못 잤어.”
간밤에 잠을 못 이룬 건 투정하듯 말하고 있는 한 사람만이 아니다.
김영옥 집사님 네 강가 밭은 또 물에 잠겼다. 뽑을 때가 다 됐던 당근이 그대로 물에 잠기고 말았다.
드넓은 강가 밭의 대부분은 당근, 당근을 팔 때가 되었는데 다시 물난리다. 하루가 다르게 굵어가던 당근이 빗속에서 짓무른 탓인지 뿌리로부터 썩어 들어오는 것이다.
미리 선금을 주고 이 밭 저 밭 밭떼기로 산 사람은 아예 앓아누웠다. 사정이야 어찌됐건 팔았으니 됐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안다.
해마다 겪으면서도 해마다 새로운 대책 없는 아픔. 잠깐의 햇볕도 없이 모처럼 비가 쉬더니만 내일부터는 또 많은 비가 올 거라 했다.
햇살이 그립다.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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