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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

화두(話頭), 모르는 길

by 한종호 2020. 10. 20.

신동숙의 글밭(256)


화두(話頭), 모르는 길



가을 바람이 부는 것을 보고, 가을 바람이 날 부르는 것으로 알고 나선 길입니다. 가을 바람에 날리우는 풀씨 한 알 만큼이나 가벼운 발걸음이 어디로 향할지 어디에 닿을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모르는 길을 나섭니다.


애초에 알고자 나선 길이 아니라 머릿 속에 가득한 앎과 안다는 생각 조차도 비우고자 나선 길이기에, 습관적으로 머리가 헤아리려 드는 하나 둘 셋 숫자도 잊고서 엎드립니다. 단지 깨어서 알아차림으로 날숨마다 좌복에 몸을 엎드리다 보면 비워질까. 날숨마다 입 속에서 모른다고 시인하면 지워질까. 하염없이 앉아 있으면 사라질까. 어디까지가 텅 비운 곳인지. 어디쯤이 나를 잊은 곳인지 까마득하기만 합니다. 


매 순간을 깨어서, 지금 이 순간으로 이 땅으로 이 몸으로 이 호흡으로 돌아와 처음처럼 다시 시작해보지만 언제나 끝이 없는 길, 애초에 길도 경계도 없는 하늘의 시간과 공간 속으로, 있는 듯 없는 모르는 길을 혼자서 걷습니다. 알기 위한 길이 아닌 모르기 위한 길이기에. 


혼자가 아니고선 걸어들어갈 수 없는 고독과 침묵의 좁은 길을, 혹시 이 길이 가을 바람에 날리우다가 흙에 떨어진 풀씨 한 알이 걸어가는 고독과 침묵의 꽃대를 닮았을까. 이 길이 과연 꽃길일까. 어둔밤을 지나서 저 하늘 먼 별빛을 우러러보며 한 걸음 한 걸음 더듬어 내딛는 가벼운 발걸음이 모름으로 향하는 바른 길일까. 이렇게 하염없이 일어나는 것이 생각인지 샘물처럼 흐르는 마음인지 바람의 숨결인지 이미 내 안에 심어놓으신 아득한 그리움인지 몸에 붙은 생명의 호흡처럼 쉼이 없습니다. 



해인사 원당암 달마선원 참선방에서 제 바로 옆자리에 앉은 어느 보살님이 앉아있는 제 오른편 무릎 위로 살풋 손가락을 찍습니다. 제 앞에 놓인 혜암 스님의 책을 보시더니, "우리집에 혜암 스님 책이 많이 있는데 다 줄까?" 하십니다. 보살님은 36세부터 40년 가까이 원당암을 다니고 있다 하시며, 자식들한테 물려주려고도 사뒀는데 인연이 없는지 아무도 받을 사람이 없다는 얘기를 아픈 명주실처럼 뽑아내십니다. 


저에게 화두는 받았느냐고 물으시며, 화두가 없이는 참선방에 앉아 있을 수 없다 하시며, 제게 불경과 화두를 주실만한 스님을 소개시켜주십니다. 그러면서 참선 수행을 하려면 <능엄경>, <신심명>, <증도가>를 꼭 읽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렇잖아도 <신심명, 증도가 강설>, <선문정로>라면 성철 스님의 저서로 이미 사두었고 언제든 읽으려 제 방 책꽂이에 있는 책들입니다. 


좌선(坐禪)의 정중동(靜中動)으로 새벽이 다가옵니다. 유난히 별이 많습니다. 이처럼 많은 별을 보았던 때가 언제이던가. 금생에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이라도 되던가. 언제나 마음으로 수없이 그리는 별이 많은 하늘이 펼쳐져 있는 것입니다. 별이 빛나는 하늘을 혼자서 우러러보는 순간은 조금은 쓸쓸하지만 하루 중 영혼이 가장 투명하고 아름답게 빛나는 순간이 됩니다. 


별과 나 사이의 거리를 잊고서 가슴이 우주로 열리는 무진장(無盡藏)으로, 말과 글을 잊고서 모름으로 들어가는 텅 빈 하늘의 시간과 공간 속으로, 그대로 나라는 몸까지도 사라지는가 싶더니 이내 연약한 몸이 따뜻한 곳을 찾습니다. 


두어 시간 온기를 쪼인 몸이 일어난 시간은 이른 아침 7시가 다 되어갑니다. 화두를 받을 스님의 연락처를 제 핸드폰에 저장을 시켜둔 일이 아침해보다 먼저 떠오릅니다. 해인사 원당암에서 충주 석종사까지 달리면 오전 10시 전에는 도착하리라 싶어 남편에게 허락을 구하는 전화를 했더니, 그러라고 합니다. 불상을 보고 있으면 석굴암 부처님의 얼굴을 닮은 남편의 얼굴과 겹쳐집니다. 무슨 인연으로 쌀쌀맞도록 냉정하고 무심한 제 곁에서 한결같은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스님께 삼배의 예를 갖추려고 했더니, 한 번만 하라고 하셔서 그 말씀을 따르기로 합니다.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앉습니다. 해인사 원당암에서 참선을 하면 그곳에 방장 스님인 원각 스님도 있는데, 화두를 받으러 여기까지 왔느냐고 물으십니다. 대답하기를, 저도 잘 모르겠지만 인연 따라서 바람이 부는 대로 온 것 같다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스님의 얼굴엔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눈은 허공을 보고 있습니다. 


스님은 두 번째 물음을 주십니다. 화두를 받을 만한 근기는 되느냐는 물음에 대답하기를, "제 그릇 만큼 담을 뿐입니다." 스님은 세 번째 물음을 던지십니다. 그 그릇이 얼마나 되느냐는 물음에 대답하기를, 제가 길을 나설 때의 마음가짐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일상 속에서 널뛰기 하듯이 짧게 드리던 감사한 마음을, 이 땅과 이 하늘에 빈틈없이 가득 채우고 싶은 한 생각으로 참선을 하러 원당암을 찾았습니다." 스님은 더 이상 묻지 않으시고, "그렇다면 화두를 주지"하시면서도, "공부가 힘들겠는데" 하십니다.


스님이 제 마음을 보고 계셨을까요. 제가 걸어가는 길을 알고서 주신 화두일까요. 아니면 우리 모두가 걸어가야 하는 하나의 바른 길일 뿐일까요. 우연인 듯 제가 받은 화두는 유이무념위종(唯以無念爲宗) '오로지 무념으로써 삶의 지표를 삼으라' 입니다. 안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모름으로, 또 다시 일어나려는 생각을 내려놓고 모름으로, 그 모름의 한 순간 한 순간이 모여서 점점 길어지다 보면, 벽도 경계도 없는 허공이라는 말씀을 입으로 풀어놓으시는 스님의 눈길이 바라보는 곳은 허공인지, 허공 너머의 어디매인지 헤아리려는 마음이 닿는 곳은 없습니다.


그 알 듯 모를 듯한 말은 색이 공이 되고, 공이 색이 되는, 마침내 색도 공도 다 비운 부처의 중도(中道)를 말함인지, 다석 류영모 선생의 빈탕한 하늘인지, 자사(子思)의 중용(中庸)을 말함인지, 이렇게 머릿 속에서 자동재생되는 이 논리와 생각들이 바로 제가 내려놓아야 할 망상인 줄로 알아차려봅니다. 그리고 또 다시 '이렇게 알아차리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뭣고!


한 생각이 일어나기 이 전의 마음, 그 맨 첫 마음은 관상의 기도 속에서 시詩와 만나는 첫 마음과 닮은 듯도 하여서, 경허선사의 만법귀일(萬法歸一) '이 우주는 하나로 돌아간다'는 법문과 숭산 스님의 '오직 모를 뿐인 마음을 지키라'는 법문으로 비추어 본다면 제가 받은 화두와 그 의미가 다르지 않습니다.


공부를 하면 할 수록 더욱 모를 뿐인, 결국엔 오직 모를 뿐인 마음을 지키는 일이, 성경에서 하느님이 말씀하신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언 4장 23절)의 말씀과도 똑같은 하나의 말씀으로 들립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어간 글방에서 만난 한희철 목사님의 시가 오늘의 제 마음을 그대로 그려낸 듯하여 그대로 옮깁니다. 


...


어느 날의 기도


한희철


보이지 않을 만큼

당신의 사랑은

깊고


들리지 않을 만큼

당신의 사랑은

넓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음으로

당신은 가득합니다.


...


모르는 길을 나선 걸음이 지대로 그런대로 걸어간 것일까요. 집으로 돌아오는 마음이 허탕을 친 듯, 온종일 낚싯대를 드리우고도 물고기 한 마리도 못 낚은 듯 허전하기만 합니다. 어쩌면 애초에 마음의 하늘엔 물고기가 살고 있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함께 살고 있는 나의 좋은 벗에게 드릴 좋은 것으로는 저의 작은 찻잔에 뜬 해와 달과 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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