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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두런두런'

담배 먹고 꼴 베라

by 한종호 2015. 3. 12.

한희철의 두런두런(17)

담배 먹고 꼴 베라

 

작실 마을에 올라갔다가 밭에서 일하고 있는 김천복 할머니를 만났다. 연로하신데다 건강도 안 좋으신데 일을 하는 모습이, 일을 해야만 하는 모습이 안쓰럽다.

땅콩을 심고 있던 할머니는 한 움큼 땅콩을 집어주신다. 이마에 맺힌 땀을 흙 묻은 손으로 썩 닦아내며 “어여 드셔!” 하신다.

마주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밭고랑처럼 주름이 깊도록 땅을 일궈 오신 할머니는 땅에 대해, 땅에 심는 곡식에 대해 훤히 알고 계시다. 설교 시간에 혼자 아는 체 떠들어대는 젊은 전도사에게 뭔가를 일러줄 것이 있다는 것이 할머니에겐 적잖은 기쁨이었을 것이다.

 

                                                    류연복 판화

 

이야기를 한참 나누고 있는데 어디선가 맑은 새소리가 들려왔다. 어릴 적 호루라기에 물을 넣고 불면 났던 소리, 더없이 맑은 꾀꼬리 소리였다.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니 밭 가장자리 비탈에 서 있는 상수리나무였다.

꾀꼬리 소리를 들은 할머니가 방금 꾀꼬리가 무엇이라 했는지 아냐고 웃으며 물으신다. 할머니는 꾀꼬리 소리도 알아들으시나 싶어 여쭸더니 할머니 대답이 재미있다. “담배 먹고 꼴 베라!” 했다는 것이다. 설마 싶은데 할머니 말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려는 듯 할머니 말이 끝나자마자 꾀꼬리가 다시 운다. 그런데 그렇게 들으니 꾀꼬리 울음소리가 “담배 먹고 꼴 베라!”로 근사하게 들린다.

한평생을 흙과 함께 자연 속에서 살아오신 할머니는 그렇게 자연과 교감을 하고 있었다. 밭에 땅콩을 심으면서도 얼마든지 꾀꼬리하고도 이야기를 나누시는 것인데, 허리 굽혀 혼자 일하는 할머니가 꾀꼬리도 안쓰러워 담배 먹고 한숨 쉬고 일하시라고, 일곱 살 손녀처럼 자꾸만 말을 건네는 것이다.

할머니는 웃으며 속으로 그러시는 것 아닐까 모르겠다.

‘녀석아, 교회 다닌 이후론 그 좋던 담배일랑 싹 끊었단다.’

 

창조와 찬조

종순이와 은옥이 두 명이 나왔는데, 무슨 일로 삐쳤는지 예배를 마치자마자 종순이가 집으로 가버렸다. 덕분에 이은영 선생은 은옥이를 혼자 앉혀놓고 유치부 분반공부를 해야 했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천지창조를 가르치기 위해 도화지에다 창조의 순서를 따라 크레용으로 예쁘게 그림을 그려왔는데, 배울 어린이는 은옥이 한명 뿐이다.

이제 막 고등학교에 올라간 은영이, 학교 근처인 문막에서 상희와 함께 자취를 하고 있다. 분명 바쁜 시간을 쪼개 준비를 했을 터인데, 바라보는 내가 다 아쉬웠다.

그래도 이은영 선생은 열심히 가르쳤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얼굴을 맞대고 앉아 단어 하나하나씩을 따라하게 했다. ‘창조’라는 말이 어려웠는지 은옥이는 자꾸만 ‘창조’를 ‘찬조’라 했다. 오기였는지 성실함이었는지 ‘찬조’가 ‘창조’가 될 때까지 둘은 앉아 ‘창조’와 ‘찬조’를 반복했다.

이 다음에 은옥이는 기억을 할까? 어렵지 않게 ‘창조’를 말할 때쯤이면. 자길 혼자 앉혀놓고 성경을 가르쳤던 이은영이라는 고등학교 선생님을. 그리고 자꾸 틀리며 따라했던 천지창조에 관한 내용들을. 이은영 선생 또한 알고 있을까?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라는 것을.

은옥이를 보내고 돌아서는 이은영 선생을 말없이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은영이도 말없이 빙긋 웃는다. 그리고는 얼른 은옥이가 앉았던 방석을 제자리에 갖다 놓는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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