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두런두런(6)
겨울나무
- 동화 -
정말로 추웠던 그 밤, 난 내 앞에 있는 나무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바람 때문이었습니다.
그날 밤, 나는 꼭 얼어 죽는 줄 알았습니다.
추워도, 추워도 그렇게 추운 건 처음이었으니까요.
밤중까진 그런 대로 견딜 만 했지만, 새벽이 되자 몸이 얼어붙기 시작했습니다.
가느다란 가지 끝에서 땅 속 실뿌리 끝까지 구석구석 온 몸을 흐르며 마실 물을 전해 주었던 작은 물줄기가 멈춰 서고 말았습니다.
잎사귀 하나 걸치지 못한 온 몸이 그냥 추위 앞에 꽁꽁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늘 정겹던 밤하늘 별들도 그 날은 왜 그리 차갑고 멀던 지요.
그렇게 온 몸이 얼어붙기 시작하자, 가장 먼저 찾아온 건 놀랍게도 졸음이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와락 졸음이 몰려왔습니다.
아지랑이 같이 아릿한 졸음이 솜처럼 온 몸을 감싸고 말았습니다.
천천히 끝 모를 수렁 속으로 미끄러지듯 나는 잠속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잠들면 안 된다는 생각도 순간순간 들었지만, 그건 희미하고 힘없는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그토록 매운 추위에 떨면서 추위를 이기려 애쓰는 것보단, 차라리 밀려드는 잠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훨씬 더 편했습니다.
한 개씩 한 개씩 가슴속 불이 꺼져가며, 나는 깊은 잠속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류연복 판화
그 때 나를 흔들어 깨운 것이 바람입니다.
누군가 온 몸을 마구 흔들어 대어 눈을 떠보니 바람이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건 그냥 몸을 흔들어 댄 게 아니라 사정없이 아프게 내리치는 것이었습니다.
칼로 긋듯이 얼어붙은 몸을 바람은 그렇게 흔들어댔습니다.
뭔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난 울고 말았습니다.
왈칵,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졌습니다.
겨우 추위 잊을 만큼 잠이 들었는데 차라리 그냥 내버려 뒀다면 좋았을 걸, 나를 흔들어 깨운 바람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습니다.
바람은 추위보다도 더 무서웠습니다.
그 매운바람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몸이 부러지지 않게 힘주어 온 몸을 감싸 안는 것뿐이었습니다.
바람을 견디다 팔이나 허리가 부러지는 것보단, 차라리 고이 얼어 죽는 게 낫지 싶었습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바람에 뒤흔들리고 있을 때, 바로 그 때, 내 앞에 서 있는 나무를 보게 된 것입니다.
온통 내 부러움을 산 그 나무를 말입니다.
그 나무는 추위는 물론 바람 앞에서도 끄떡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 나무는 지난해부터 봄이 되어도 푸른 잎을 내지 않더니, 가을엔 잔가지마저 모두 떨어뜨리고 굵은 몸뚱이로만 겨울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나무는 우뚝 내 앞에 버티고 서서 나를 비웃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어쩔 줄 모르고 흔들리는 내 자신이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터질 듯 얼어붙은 몸이 정신없이 흔들리며 뜬 눈으로 밤을 새우던 그 밤, 난 참 많이 울었습니다.
겨울밤은 길기도 무척 길었습니다.
어느덧 봄이 왔습니다.
사람들은 달력으로 알지만, 우린 볕과 바람으로 압니다.
봄이 되면 모든 것이 긴 잠에서 깨어납니다.
그러나 실은 봄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겨울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봄은 겨울을 이긴 자만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어린 제가 어쭙잖게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지난겨울 그 혹독한 추위를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제가 그날 밤 그토록 부러워했던 제 앞의 그 시커먼 나무는 봄이 온 지금도 깨어날 줄 모르는 걸요.
전엔 몰랐지만 이젠 제 몸에서 돋아난 파란 이파리 하나하나와 진분홍 꽃잎 하나하나를 더없이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이건 겨울을 이겨낸, 잠의 유혹을 이겨낸 내 빛깔이며 향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 그렇게 견디기 어려웠던 추위와 잠든 나를 마구 흔들어 깨웠던 바람, 이젠 모두에게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눈이 부실 만큼 생명으로 가득 찬 봄은 그들이 가르쳐 준 귀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한희철/동화 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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