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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

찢어진 커튼 바느질

by 한종호 2020. 11. 13.

신동숙의 글밭(274)


찢어진 커튼 바느질


거실창 커튼이 찢어지기 시작한 것은 우리집에 탄이가 오면서부터입니다. 탄이는 털이 새까맣고 작고 귀여운 강아지 포메라니안입니다. 이제는 몸집이 다 자랐는데도 원체 작다 보니 탄이는 계속 강아지로만 보입니다. 


새로 산 핸드폰 충전기 줄을 세 개나 물어서 끊어 놓고, 유선 케이블 연결선을 세 차례나 끊어 놓아 통신사 기사님을 성가시게 한 적도 많고, 아무리 미운 짓을 거듭해도, 탄이의 까만 눈망울을 보고 있으면, 미운 마음이 스르르 녹아서 사라지게 되는, 탄이의 얼굴은 이미 현묘지도(玄妙之道)를 지닌 듯도 합니다.


제 어릴 적 기억에, 겨울이 다가오는 이 무렵이면 부모님에겐 월동 준비로 연탄 100장을 장만하시는 일이 큰 숙제였습니다. 키다리 연탄집 아저씨가 연탄을 지게에 지고서 힘겹게 비탈길을 올라오셔서 우리집 창고에 쌓아두시던, 새까만 연탄처럼 털이 깜다고 해서 고민 없이 탄이라고 이름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딸아이는 탄이가 BTS의 애완견과 똑같이 생겼다며 친구들에게 자랑을 해서, 쉬는 날이면 가끔 딸아이의 친구들이 와서 심심해 하던 탄이와 놀아주기도 합니다. 처음에 탄이와 눈이 마주친 순간 첫눈에 반했다는 아들은 '김연탄'이라고 부릅니다.


탄이의 보금자리로 거실창 앞에 노란색의 낮은 울타리를 두르고 둥지처럼 작은 집을 마련해 주었더니, 제 집 옆에 있는 커튼 뒤로 숨기도 하고, 집에 아무도 없는 낮에는 커튼을 물고 당기고 놀면서 지내기도 했던가봅니다. 그냥 예사로이 보아 넘겼는데, 어느 날 보니 아예 커튼 밑둥이 갈기갈기 뜯겨져 있었습니다. 눈에 드러날 정도는 아니어서 따로 손을 쓰지 않고 그대로 두었는데, 문제는 커튼 중간 부분에 작은 구멍이 생기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거실 커튼이 제법 오래되기도 하였습니다. 전망이 좋은 남향 아파트에서 살 적에 밀려오던 공허감, 불현듯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땅을 밟을 수 있고, 머리에 하늘을 이고 잠들 수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점점 자라 하늘 만큼 커지면서, 어디 시골 촌집이라도 좋으니 마당이 있는 집을 알아보게 된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지금의 낡은 커튼은 이곳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오면서 처음으로 달았던 커튼입니다. 어느덧 우리 가족들과 함께 십여 년의 세월을 넘어 함께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 집주인이 심어놓은 감나무, 매화 나무, 목련 나무, 쥐똥 나무, 석류 나무, 은행 나무들이 처음에 만났을 땐 키가 나즈막하니 지붕의 처마를 넘지 않았는데, 해마다 1~2미터씩 키가 웃자라다 보니, 가지를 쳐주는 일이 한 해를 마무리하는 숙제가 되었습니다. 올해는 옆집에서 소나무 전지를 하던 날 덩달아서 일찌기 가지치기를 하는 바람에 온 마당을 뒤덮는 단풍잎과 노란 은행잎 융단을 볼 수 없게 되어 내심 안타깝지만, 친정 엄마는  마당에 빗자루질하던 한 짐을 덜었다며 속시원해 하십니다.


거실 마루에 앉아서 나무와 돌담과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있는 거실창은 투명한 유리창입니다. 집 안에서  사계절의 빛깔을 다 볼 수 있는 거실이라서, 자연을 집 안으로 들이는데 거스르지 않을만한 색감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 중에서 어떤 잎사귀의 색을 커튼 색으로 정할지 마음에 대어보고 또 대어보던 초보 살림꾼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선택한 색이 제가 좋아하는 신록의 계절 5~6월의 잎사귀를 닮은 초록 색감의 워시면입니다. 새 것이지만 새 것 같지 않은 이미 한 번쯤 빨아서 말린 듯한 느낌이 드는 천이 워시면이라고 해서 마음에 들어 선택을 한 것입니다. 새로 샀지만 처음부터 새 것 같지 않았던 거실 커튼과 그동안 함께 흐른 세월이 15년이 다 되어간다고 하니 버려도 아깝지 않을 물건이지만, 물건의 가치와 효용을 세월만으로 따지기엔 '그게 다가 아닌데'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햇살과 바람에 커튼은 색이 바래고 천은 삭아서 작은 탄이의 입질에도 맥없이 뜯기고 찢겨져 나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저 낡고 삭고 볼품 없어진 커튼을 한동안 그냥 지켜보기로 하였습니다. 


이참에 새 커튼으로 바꿀까 싶은 마음도 사이 사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자면 또 성철 스님이 손수 기워 입으시던 누더기옷이 바람처럼 말을 걸어옵니다. 그러다 보면 새 커튼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게 됩니다. 그러다가 또 하루가 지나면 구멍 난 커튼은 잊고서 몇 날을 지내기도 합니다. 낮에는 커튼을 걷어 두니 사실 누가 일부러 펼쳐서 들추어 보기 전에는 표가 잘 나지 않기에 그럭저럭 찢어지고 구멍 뚫린 커튼과도 공생해 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밤입니다. 밤이 되면 커튼을 펼쳐서 집 안에서 생활을 해야하는데, 그 커다란 구멍이 또 하나의 창이 되어서 까만 바깥 세상이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집 앞을 지나는 이웃들에겐 집 안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창문이 되겠지요. 당장이라도 새 커튼으로 바꾸고 싶은 마음이 또 다시 일어나려는 생각을 다시금 내려놓게 하는 것은 어릴 적 아버지의 재봉틀입니다. 


손재주가 좋으셨던 아버지는 마당에 남동생과 저를 앉혀 놓으시고 보자기를 어깨에 둘러 빨래집게로 고정을 시키신 후 남동생과 제 머리를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 놓으신 후 알밤을 보듯 흐뭇해 하곤 하셨습니다. 일명 바가지 머리를 국민학교 5학년 때까지 그 바가지 머리를 해오면서도 단 한 번도 안하겠다고 반항을 한 기억이 없습니다. 6학년이 되고서야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뒤늦게 깨친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아버지의 손길이 남긴 흔적으로, 아버지가 꼬매주신 엄마의 양말이 있습니다. 혹시나 깔끔한 성미의 남동생이 고민도 않고 버릴까 싶어서 얼른 챙겨서 저희집 반짓고리함에 모셔두었습니다. 남동생의 집은 모델 하우스처럼 보일 정도지만, 저희집에 있는 살림살이들이라 해야 탐낼만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는 낡은 통나무 탁자, 이제는 빛바랜 통나무 거실 낮은 탁자, 이제는 손떼 뭍은 통나무 책상, 이제는 향이 그윽한 나무 책꽂이와 선반 등 세련된 것이라곤 하나도 없지만, 우리집에 찾아오는 어느 누구에게도 위협적이거나 탐심과 소비심을 자극하지 않을만한 살림살이들이라서 착하고, 그럭저럭 스스로 만족해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친정 엄마는 아이들이 크면 그때 가서 가구를 다 바꾸면 되겠지 하고 말씀하시지만, 제 속을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애초에 나무를 선택하고 주문 제작을 할 때부터 나무 가구는 저에겐 평생의 동반자이자 도반이라 여기는 마음입니다. 법정 스님의 의자와 소로우의 소박한 책상을 닮은 소박하고 단순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면서요.


우리 어릴 적 아버지가 쉬시는 날이면, 재봉틀로 바짓단을 줄여 주시기도 하고 늘려 주시기도 하셨던 추억이 있습니다. 재봉틀은 기름칠을 주기적으로 해주지 않으면 녹이 난다 하시며 언제나 반질반질 윤기가 돌도록 하셨는데, 그때의 재봉틀 주변에서 풍기던 기름 냄새와 대못에 감긴 실 내음이 아련합니다. 


이사할 적마다 따라다니던 재봉틀이 어느 순간 보이지 않게 된 시기는 새로 이층집을 지어서 살게 된 다음입니다. 가끔 빈티지 카페나 샾에서 아버지의 재봉틀과 닮은 오래된 재봉틀을 볼 때면 그리운 마음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때 저에게 이만큼의 안목이라도 있었더라면, 아마도 저희집 한 켠엔 아버지의 재봉틀이 지금껏 함께 살아오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의자에 앉아서 무쇠 발판에 두 발을 나란히 올려 놓고 발끝과 뒤꿈치를 앞뒤로 굴리며, 동시에 오른손으로 무쇠 손잡이를 돌리면서도 시선은 바늘끝을 향해 있어야 하던 아버지의 재봉틀. 실타래가 빙빙빙 돌아가면서 감기기도 하고 반대로 풀리기도 하던, 바늘 끝에 난 구멍을 통과한 윗실과 아랫실이 천과 천을 호아주던 한 땀 한 땀을 떠올리며, 오늘 아침엔 거실창 커튼 곁에 서서 손바느질로 흉내내보기로 하였습니다. 


지나고 보면 아쉬운 일, 아쉬운 순간, 아쉬운 만남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는 묵은 마음들이 새물결처럼 일렁일 때가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사람이 후회를  안하고 살아갈 수는 없지만, 그 후회를 줄여 나가는 방법에 대해서, 누군가 법정 스님에게 물었던 물음에 대한 스님의 답변이 늘 제 가슴에 맑은 바람처럼 맴돕니다. 


"자연에 가까이, 마음에 가까이", 그러한 맑은 흐름을 따라서, 저 역시도 물건과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바른 안목을 일찌감치 젊었을 적부터 기를 수 있다면 좋겠다는 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순례길입니다. 지구와 생명을 사랑하는 소박하면서도 아주 단순한 방법은 소비를 줄여 아껴 쓰는 방법이 최선입니다. 물론 늘 그에 미치지 못하는 삶이지만, 늘 하늘의 호흡처럼 동행하는 마음입니다.


재봉틀을 버리시던 그 옛날 아버지의 생각에는, 새로 지은 집으로 이사를 하시고, 자녀들의 키도 거의 다 자라서 재봉틀로 옷수선 할 일이 크게 없다고 여기셨을까요. 아니면 새집에는 낡은 재봉틀이 어울리지 않다고 여기셨을까요. 저도 나이가 들어서 이제야 문득 아버지의 그 마음이 궁금해지지만, 이제는 물어도 대답을 들을 수 없는, 가슴 속에 일렁이는 질문들은 흘러 넘쳐서 세상 사람들에게로 그리움의 물길을 냅니다. 



오늘 아침 햇살이 좋은 가을볕에 한결 더 빛이 바래고 삭아가는 낡은 커튼이지만 제게는 평온함을 주는 이유는, 그 옛날 커튼을 고를 때의 첫 마음 만큼은 변치 않고 그대로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정오까지 계획했던 일들을 접어두기로 하고, 이불을 깁는 대바늘 귀에 연초록색 실을 두겹으로 꿰었습니다. 높이만 2미터가 넘는 거실 커튼을 걷어내서 혼자 힘으로 또 다시 거는 일이 힘에 부칠 것 같아서, 그냥 서서 깁기로 하였습니다. 세로로 찢어진 곳은 내려가면 되니 비교적 한 땀 한 땀이 수월하지만, 가로로 찢어진 곳은 중력의 힘에 의해 아래로 늘어져 맥없이 마저 주저앉으려는 환자를 부축해서 일으켜 세우듯 힘에 겹습니다. 


커튼 천은 삭아서 조금만 힘을 주어 당겨도 쉬 찢어지려고 합니다. 초여름의 신록빛이었다가 이제는 가을 목련잎의 노란 빛깔을 닮아가는 커튼이 앞으로 얼마만큼의 세월을 더 이겨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며 따뜻한 눈길을 보내는 일 만큼은 한결같으리라는 한 마음을 저 혼자서 속으로 약속할 수는 있을 듯합니다. 처음 커튼을 고를 때의 그 신록빛의 첫마음은 여전히 변치 않았기에.


오랜 세월에 빛이 바래고 낡고 삭고 주저앉으려는 이 땅의 모든 것들은, 이제는 햇살과 바람과 하늘의 일로 넘겨두기로 하면서, 땅의 일들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는 자유로운 길이 있습니다. 넓다란 천이 한 조각이 되기까지 따뜻한 시선을 거두지 않다보면, 마지막 한 점까지 이 땅을 사랑으로 채우기를 원하는 하늘을 닮은 마음. 어쩌면 그것이 하느님이 명령하신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마음을 지키는 일에 순명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따뜻하게 한 땀 한 땀 이어져 흐르는 오후의 한나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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