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숙의 글밭(273)
가을은 레몬 홍차
차 한 잔이 주는 여유와 여백을 좋아합니다. 가을빛이 짙어갈 수록 도로변에 서 있는 가로수들도 저처럼 여유와 여백을 좋아하는지, 여름내 푸른 잎들로 무성하던 나무들이 이제는 자신의 둘레를 비우고 덜어낸 자리마다 하늘의 여유와 여백으로 채워가고 있는 11월의 가을입니다.
사람에게도 자신이 살아가는 물질적인 삶의 둘레를 비운 만큼 마음의 하늘이 차지하는 공간은 넓어지리라 여겨집니다.
해 뜨기 전부터 시작하여 해가 져도 그칠 줄 모르는 분주한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잠시 멈춤이란 얼음땡 놀이에서 구하는 멈춤의 순간 만큼이나 몸과 마음과 숨을 부자유하게 만드는지도 모릅니다.
숨을 쉬고 움직이며 살아가는 생명들에겐 왠지 부자유스러운 멈춤을 물 흐르듯이 자유로이 흐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차(茶)가 아닌가 하고 생각해봅니다. 만약에 곁에 차(茶)가 없다면 수차(水茶), 맑은 물 한 잔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스무살의 가을날 학교 밑 카페에서 처음으로 주문한 차 음료는 레몬 홍차였습니다. 홍차 티백에 붙은 하얀 실을 홍찻잔 손잡이에 돌려서 걸어 놓던 모습과 맑고 투명하던 붉은 홍차 빛깔이 떠오릅니다.
가끔은 레몬 조각을 띄워주는 찻집을 만나기도 하고, 인심이 좋은 주인은 두 개의 티백을 작은 찻잔에 넣어준 적도 있는데, 그때는 적당히 우려내고 건져내어야 하는 다법을 몰라서 쓰고 떫은 차맛을 나름 견뎌내기도 하였던 것 같습니다.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춤의 여유와 여백의 숨돌림을 주는 차 한 잔이 저에게는 친한 벗이 되었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홀짝 홀짝 조금씩 마시는 물과 차가 늘 곁에 있으니 하루가 왠지 모르게 편안하게 흐릅니다.
요즘처럼 추운 가을에는 따뜻한 차 한 잔이 마음속까지 따뜻하게 데워주기도 하고요. 생각이 막힐 때에는 풀리기도 하고, 차와 하루에 대해서 이렇게 사색을 하다보면, 차를 벗으로 삼았던 옛 선비와 선사들과 선현들의 이야기가 두런두런 물소리처럼 들려오는 듯합니다.
핸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시민의 불복종>을 읽다가, 자연과 차에 대한 명쾌하고 아름다운 구절을 보아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자연의 산책가라는 직업으로 불리기를 좋아했던 소로우가 숲 속을 산책하면서 들려주는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짙어가는 이 가을빛이 레몬 홍차의 빛깔과 향과 맛처럼 더욱 선명히 그윽하게 다가올지도 모르겠습니다.
"... 이제 늪지대에 가면 건강에 좋은 약초 즙을 얻을 수 있다. 잎사귀들이 부식될 때 나는 약 냄새는 정말 향긋하다. 갓 지거나 떨어진 풀잎과 낙엽 위에 비가 내리거나, 깨끗한 낙엽들이 떨어진 물웅덩이나 도랑에 비가 내려 물이 가득 차면 이 낙엽들은 차(茶)로 변한다.
녹색과 흑색, 갈색과 황색의 다양한 빛깔에다 진하기도 가지각색이다. 온 자연이 마시고 수다를 떨기에 부족하지 않은 충분한 양이다. 그 차는 아직은 충분히 달여지지 않았다. 우리가 그것을 마시든 안 마시든 간에, 자연의 위대한 솥 속에서 건조된 이 찻잎들은 너무나 다양하고 정교한 빛깔을 띄고 있기 때문에 저 유명한 동양의 차들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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