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창세기 8:22).
한 번도 뵌 적 없는 분들에게 편지를 쓰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사실 사별의 아픔을 겪은 이들에게 말을 건넨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자칫하면 아물어 가고 있던 상처를 후벼파거나, 슬픔의 기억을 소환하는 일일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편지를 올리는 것은 뭔가를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슬픔에 공감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삶은 다양한 만남의 점철입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의 태도와 지향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관계’라는 단어는 ‘빗장’이라는 뜻의 ‘관關’과 ‘잇다’라는 뜻의 ‘계係’가 결합된 것입니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의 빗장을 열어 그와 연결됨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일 겁니다. 관계 맺음은 그런 의미에서 결단입니다.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타자들과 만나지만 우리 인생에 소중한 타자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삶이 그런대로 괜찮다고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때일 겁니다. 소속과 연결이야말로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기본 바람일 겁니다. 하지만 그 연결이 지나치게 많거나, 그 연결이 오히려 우리 삶을 옥죄는 사슬이 될 때 우리는 고독에의 열망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연결을 원하는 동시에 그 연결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모순된 소망을 품고 우리는 시간 속을 바장입니다.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을 섬세하게 키워가다가 마침내 혼신의 힘을 다하여 파트너의 이름을 호명함으로 부부가 된다는 것은 참 신비한 일입니다. 삶의 조건이 어떻게 변하든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과 평생 함께 걷겠다는 결혼 서약은 그 신비 속으로 성큼 들어서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인간의 선택이지만 결혼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약은 그렇기에 엄중한 것입니다.
결혼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 서로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겠지만 더 근본적 외연은 서약에 대한 충실함입니다. 오랜 세월을 함께 지내다보면 사랑의 감정이 식을 때도 있고, 권태감이 찾아들 때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관계의 위기가 찾아와 결국 헤어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부부간에 벌어지는 갈등은 어느 누구도 함부로 재단하거나 평가할 수 없습니다. 만나고 헤어지기도 하는 게 인생이라지만, 그 만남의 기억은 쉽게 망각의 강으로 흘려보낼 수 없습니다. 그 기억은 어떤 형태로든 우리 영혼에 흔적을 남겨놓게 마련입니다. 중도에 사별의 아픔을 겪은 이들이야 새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것이 부모 자식간의 관계이든, 부부간의 관계이든, 가장 가까운 이들이 우리 곁을 떠난다는 것은 자기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고통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리면 세상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낯선 곳으로 변해버린다는 말입니다. 나가사키의 바닷가에는 소설 《침묵》을 썼던 엔도 슈사쿠의 비문이 있다고 합니다. “인간은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도 푸르릅니다.” 설명하지 않더라도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문장일 겁니다.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는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누구나 아는 뻔한 이야기 같지만, 그 말은 그의 철학 이해를 위해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은 자기의 유한성을 알 뿐 아니라 죽음을 의식하며 사는 존재입니다. 죽음을 의식하지만 죽음은 우리 경험 속에 없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있지만 그것이 진짜 죽음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죽음의 경험은 사실은 가장 가까운 이들의 죽음이 우리 속에 불러일으키는 두려움과 상실감 그리고 쓸쓸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할 때 이런 전제를 한다고 합니다. ‘나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아니다’라는 생각은 우리 삶에 안정성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불행한 사건과 사고에서 나만은 예외가 되어야 한다는 덧없는 생각의 반향일 뿐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한계상황 앞에 설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죽음, 죄책, 질병, 우연 등은 우리의 일상을 뒤흔들고, 우리 생의 유한함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한계 상황은 우리를 몹시 힘들게 만들지만 본래적 삶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예기치 않는 시간에 닥쳐온 아픔과 슬픔을 경험한 분들입니다. 사고로 사랑하는 이를 잃은 분도 계시고, 질병으로 사랑하는 이를 잃은 분들도 계십니다.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혹은 파트너의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 때 삶의 토대가 흔들렸다는 고백은 참 적실합니다. 든든한 줄 알았던 터전이 흔들릴 때 우리는 멀미를 느낍니다. 돌연 익숙하던 세계가 낯선 곳으로 변하고, 세상에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외로움이 찾아들 때 어떻게들 견디셨습니까? 앞서 잠시 언급했던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처음 읽었을 때 어떤 문장에 이르러 멍해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의 기독교 박해사를 다룬 이 소설은 참으로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견지하려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들을 끝내 지켜주고 싶었던 신부가 바라보는 가운데 한 사나이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후미에라고 하는 성화상에 발을 올려놓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부는 텅 빈 안마당에 하얀 햇빛이 내리쬐고 있는 광경을 지켜보며 삶의 부조리함에 몸서리칩니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매미가 계속 울고 있다. 바람은 없다. 파리 한 마리도 여전히 그의 주위를 윙윙거리며 날고 있다. 외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한 사람의 인간이 죽었다고 하는데도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런 일이…, 이럴 수가….’ 신부는 창살을 꼭 잡은 채 현기증을 일으켰다”(엔도 슈사쿠, 《침묵》, 김윤성 옮김, 바오로딸, 209쪽).
그에게 현기증을 일으킨 것은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한 인간이 죽었는데 외계는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무심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안마당의 고요함과 매미소리, 그리고 윙윙거리는 파리소리’가 그렇게 부조리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별자들이 겪는 일도 마찬가지라지요? 나는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슬픔을 겪고 있는데 세상은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지속되는 현실에 분노할 수도 있겠습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상실감이 일으키는 우울증에 대한 반응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멜랑콜리입니다. 성찰적 거리를 두고 자기가 겪은 일을 돌아보기보다는 우울 속으로 더 깊이 침강하는 심리적 태도가 그것입니다. 멜랑콜리에 사로잡히는 순간 사람들은 자기가 겪는 모든 어려움을 외부의 탓으로 돌리곤 합니다. 원망, 히스테리, 자학 등을 낳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다른 하나의 반응은 애도입니다. 자기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려고 애를 쓰면서, 상실을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진정한 애도는 삶의 에너지를 정상으로 되돌려 놓기 위한 노력을 포함합니다. 애도자는 상실한 사랑의 대상을 지속적으로 기억함으로 자기 삶의 일부가 되게 합니다. 기질이나 삶의 여건에 따라 이런 반응으로 갈리는 것 같습니다. 삶의 가장자리로 떠밀렸는데 중심에 이르는 길을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습니다. 길을 찾을 의욕도 없고, 기다림조차 부질없어 보일 때, 희망의 불빛은 가물거리게 마련입니다.
살다보면 우리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현실에 직면하곤 합니다. 합리적이고 질서정연한 줄 알았던 세상이 사실은 혼돈 그 자체이고, 누군가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놀라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나 다른 이들에게 드러나지 않는 슬픔의 지층이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이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생의 이면입니다. 소설가 이승우는 〈마음의 부력〉이라는 소설에서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가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큰 아들에 대한 미안함을 평생 간직하고 사셨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이렇게 자책합니다.
“상실감과 슬픔은 시간과 함께 묽어지지만 회한과 죄책감은 시간과 함께 더 진해진다는 사실을, 상실감과 슬픔은 특정 사건에 대한 자각적 반응이지만 회한과 죄책감은 자신의 감정에 대한 무자각적 반응이어서 통제하기가 훨씬 까다롭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상실감과 슬픔은 회한과 죄책감에 의해 사라질 수도 있지만, 회한과 죄책감은 상실감과 슬픔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오히려 그것들에 의해 더 또렷해진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제44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이승우, 〈마음의 부력〉, 문학사상, 47쪽).
아마 여러분의 마음도 이럴 거라고 짐작합니다. 사별의 고통을 더욱 견디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사랑하는 이의 부재가 아니라, ‘나 때문에’ 혹은 ‘더 잘해 줄 걸’이라는 자책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지금 내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은 언제나 그렇듯 당연히 여기 있는 줄만 알았습니다. 때로는 다정하게 지내지만, 때로는 성을 내기도 하고, 등을 돌리기도 합니다. 당연하게 생각한 그의 존재가 ‘비존재’로 바뀔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시인 김승희의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2〉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아침에 눈뜨면 세계가 있다
아침에 눈뜨면 당연의 세계가 있다
당연의 세계는 당연히 있다
당연의 세계는 당연히 거기에 있다”
너무 뻔한가요? 그런데 시인은 “당연의 세계에서 나는 당연하지 못하여/당연의 세계가 항상 낯선 나”라고 노래합니다. 당연의 세계가 항상 낯설기만 하다는 것처럼 아뜩한 노릇이 또 있을까요? 삶은 이렇게 처연한 것이지만 그런데도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더 이상 볼 수 없는 데도, 때가 되면 배가 고프고, 공과금 내야 하는 시간은 꼬박꼬박 돌아오고, 돌보아 주어야 할 이들이 눈에 밟히고,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런 일상이 우리의 삶을 존속 가능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성경구절은 노아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시간은 지속될 것이고, 계절의 변화 또한 지속됩니다. 바로 그것이 은총의 징표라는 것입니다. 납득하기 어렵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거기에 삶의 길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일보다 그렇지 못한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납니다. 물론 쓰나미처럼 몰려와 우리 삶을 뒤흔드는 자연재해도 그렇지만 선한 이들에게 닥치는 불행도 많습니다. 우리 사회 시스템 속에 내재된 불의에서 비롯되는 악도 많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 마음에 익혀온 권선징악의 윤리가 작동되지 않는 현실을 목도한다는 것은 참 쓸쓸한 일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시편의 시인들도 이런 현실 앞에서 탄식하곤 했습니다. ‘어찌하여’, ‘언제까지’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조리한 현실에 당혹감을 느낍니다. 그 당혹감을 안고 사는 것이 인생인가요?
마치 삶에 정답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은 대개 삶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거나, 다른 이들을 오도함으로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인 경우가 많습니다. 삶이란 어쩌면 답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욥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급전직하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며칠 사이에 재산을 다 잃고, 자식도 다 죽고, 아내에게 버림받았고, 몸에는 사람들이 혐오할 만한 질병이 나타났습니다. 그를 위로하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세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칠일 낮과 밤을 친구 곁에 머물렀습니다.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만한 우정이 또 있을까요? 그런데 욥이 자기 처지를 한탄하며 태어난 날을 저주하자 친구들은 깊은 침묵을 깨고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욥이 그런 처지에 떨어진 것은 숨겨진 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번에 걸쳐 논쟁이 계속되지만 기본 전제는 욥의 죄가 그런 현실을 잉태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창조하고 섭리하시는 세상의 질서정연함을 확신합니다. 대단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은 틀렸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다 안다고 하는 것은 오만일 뿐입니다. 세상에는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피조물인 우리는 다만 그 현실을 겪어낼 뿐입니다. 비극적이지만 그건 어김없는 삶의 실상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알 수 없는 일을 아는 것처럼 말했다고 하여 꾸중을 듣습니다. 모름을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도 그 불행의 와중에 사람들이 들려주는 섣부른 위로의 말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하시더군요. 좋은 의도로 하는 바른 말이 때로는 더 큰 상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애도의 시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어진 사건을 제멋대로 해석하려는 이들을 보면 분노의 감정이 일기도 합니다. 말이 오히려 소통의 장애가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가장 큰 슬픔의 시간에 제일 고마운 사람은 곁에 머물러 주는 사람이 아니던가요? 물론 홀로 있고 싶은 시간도 있겠습니다만. 곁에 있어 주는 사람은 우리가 삶의 세계로 복귀하려 할 때 ‘설 땅’이 되어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결핍에 집중되어 있는 우리 시선을 ‘있는 것’에 돌리도록 해주기도 합니다. 숙명의 잡아당기는 힘에 저항할 힘을 우리 속에 채워주기도 합니다.
사별자들의 모임은 어쩌면 슬픔의 강에 놓인 징검다리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두 다 아픔과 상실감을 겪은 이들이기에 서로의 감정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고, 격려하고 보듬고 일으켜 세워줄 수 있는 모임이었으니 말입니다. 그곳은 장벽이 무너진 세계라지요? 차마 다른 이들에게는 할 수 없는 내밀한 이야기도 털어놓을 수 있고, 새로운 관계를 맺을 용기도 북돋워주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요.
그곳에서 함께 글로 공유했던 이야기들은 사별자들이 슬픔의 미궁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해준 아리아드네의 실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를 객관화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물론 글은 쓰는 이의 주관이 들어가지만 그의 경험을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 전하기 위해서는 객관화 작업이 필수입니다. 가장 깊은 내면의 고백이라 해도 거리두기는 필수입니다. 글의 내용을 살아냈던 나와 글을 쓰는 나는 같은 나이면서도 다릅니다. 글쓰기라는 행위는 자기를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쓰기 전까지는 내 생각과 감정의 빛깔을 이해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씀을 통해 우리는 가장 내밀한 자신과 만납니다. 과거의 나와도 만나지만 미래의 나와도 만납니다. 그래서 글쓰기는 새로운 삶을 향한 발돋움입니다.
길고 지루한 이야기를 마쳐야 할 시간입니다. 저는 생텍쥐페리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참 좋아합니다. 그는 1935년에 파리와 사이공 사이의 장거리 항로 개척 비행 중에 북아프리카의 리비아 사막 한복판에 추락했던 적이 있습니다. 산채로 모래바다 위에 내던져진 것만도 기적이었습니다. 침착한 그는 치밀한 과학자의 계산으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모색하여 인간의 세계로 되돌아갈 길을 찾아 헤맸습니다.
“습도가 낮은 이곳에서 이대로 가면 24시간이 지나면 목숨이 가랑잎처럼 말라버릴 것이다. 하지만 지금 동북풍이 바다 쪽에서 불어오니 습도는 약간 높아질 것이다. 그래, 동북쪽으로 가자.”
그는 밤에는 낙하산 천을 찢어 모래 위에 깔아놓았다가 새벽에 이슬을 짜서 목을 축였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면서 구원의 여망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냉철한 그는 마지막 방법을 쓰기로 합니다. 비행기의 잔재를 태우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서 불을 다룰 수 있는 동물은 오직 인간뿐이니, 누군가가 사막에서 일어나는 불꽃을 본다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누군가가 찾아와 주기를 고대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대로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문득 그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라디오 앞에 앉아 이지러진 얼굴로 절망에 잠겨 기다릴 아내의 얼굴과 불안과 초조에 사로잡힌 친구들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때 섬광처럼 “조난자들은 내가 아니라 바로 그들이다. 내가 그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인식의 전환이 일어난 것입니다.
비슷한 맥락이긴 합니다만 생텍쥐페리는 다른 소설에서도 안데스에서 조난당했다가 귀환한 기요메라는 비행사의 말을 들려줍니다.
“내가 한 일은 결단코 어떤 짐승도 일찍이 한 일이 없을 거라고 단언하네”(《인간의 대지/야간비행/어린왕자/남방우편기》, 안응렬 옮김, 동서문화사, 41쪽).
그가 한 일은 절망을 딛고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디딘 것입니다. 조심스러운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조난자’는 내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이들인지도 모른다는 인식의 전환, 그리고 어떠한 조건 속에서도 한 걸음씩 희망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겠다는 결의야말로 우리 앞을 비춰주는 등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서 세상을 떠나신 분들은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분의 자비에 맡기십시오. 그리고 용감하게, 씩씩하게 주어진 길을 걸으십시오. 주님의 은총이 사별의 고통을 경험한 모든 이들을 감싸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평안을 빕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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