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을 수 없는 게 죽음이다. 그러니 “죽음을 넘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할까? 그런데 그것을 해내는 이들이 있다. 그것도 자신을 넘어 남들을 위해서.
이들은 사랑하는 배우자가 세상을 떠난 후 겪는 충격과 고독 그리고 고통의 삶을 끌어안고 그 힘겨운 내면 풍경을 우리에게 드러낸다. 그런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것은 아무래도 고통스럽다. 그래서 슬며시 외면하는 것이 마음 편한 선택이다. 이들이 그걸 모를까?
폐허가 따로 없다
귀담아 들어주고 알아주는 이야기도 아닌 것을 세상에 내놓는 것은 어리석다. 그 어리석음을 모르지 않는 이들은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을까? 《나는 사별하였다》는 이 정직한 제목은 사실 가혹하면서 도발적이다. 책장을 넘기고 들춰보고 싶게 하지 않는다.
그 도발성은 죽음이라는 주제를 난데없이 평안한 일상에 끌어들이는 우격다짐처럼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다. 평안한 일상에 난데없이 습격해 들어온 배우자의 죽음. 그러자 지금까지 지탱해온 삶이 온통 구겨지고 허물어진다. 폐허가 따로 없다. 혼자 이 모든 폭풍을 견뎌내야 한다. 죽은 것은 배우자인데 온몸과 영혼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은 그 자신이다.
시련은 언제나 혹독하다.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시간의 속도는 느려지고 그 시간 속에 잠겨가는 존재는 이전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다. 온 힘을 다시 끌어모아 일어나려 해도 마음은 끝없이 흩어지고 인생에 부는 바람은 그치지 않는다. 아침은 태양이 아니고 저녁은 고요가 아니다.
네 명의 사별자들은 이렇게 자신의 삶이 붕괴되는 것을 절절하게 겪는다. 지금까지 당연했던 것들이 하나도 당연하지 않으며, 계획했던 미래는 불투명한 안개의 강철같은 벽에 갇히고 만다. 그래서 하나씩 놓아버린다. 시간의 위로를 기다리기에는 이미 그 영혼이 지쳐있고 육신은 제 것이 아니다. 그러다 퍼뜩 가슴에 날아드는 생각 하나가 이들을 살려내기 시작한다.
“배우자의 죽음을 부둥켜안고 마냥 슬픔에 잠겨 삶을 포기하거나 망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먼저 간 배우자들이 그토록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하루하루가 얼마나 귀한 시간임을 절감했고, 인생이 얼마나 무상하고 허망한 것인지도 체감했다. 우리는 상실의 고통과 시간을 통해 남들은 얻을 수 없는 또 다른 삶의 의미를 깨달았다.”
온 세상에 자기만 가장 아프고 힘겨운 줄 알았다가 이들은 한걸음 더 내디딘다.
“우리가 누군가의 글을 통해 위로를 받은 것처럼 지금 어딘가에서 혼자 울고 있는 사별자에게 이 책이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 수 있길 바랄 뿐이다.”(38쪽)
죽음을 넘은 자리에 마련된 자리
하소연을 쏟아내려 한 것이 아니다. 슬픔의 강으로 우리를 데려가려는 것도 아니다. 이정숙, 권오균, 임규홍, 김민경. 이 네 분의 사별자들은 자기 삶의 테두리에 묶여 지내지 않게 되었다. 뜻하지 않은 여정이었으나 이들이 그렇게 밟아온 길이 뒤에 오는 이들에게 따뜻한 이정표가 되어주고 있다.
“나의 상실과 슬픔에만 집중해 있을 때 나의 슬픔과 고통은 거대해 보였다. 그러나 다른 이들의 상실과 아픔을 깊이 마주할수록 거대했던 나의 고통과 슬픔이 점점 작아진다. 나는 그들의 아픔을 깊이 마주하면서 위로를 받았고 내가 혼자 광야에 던져진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나는 그들을 통해 애통하는 가운데 광야를 건너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47-48쪽)
“애통하는 이여,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이 다시 새겨진다. 이어지는 말씀은 무엇이었던가? “저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니.”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들은 위로받는 이를 넘어 위로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죽음을 넘은 자리에 이들에게 마련된 자리다.
아프지만 고맙다
문득 돌아보니 당연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거기서 피어나는 것은 감사다. 인생사는 고난이 있을지라도 세어보면 축복 또한 적지 않다. 그걸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후회스러움이 밀려온다.
“결혼생활을 할 때는 내가 훌륭한 남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네가 떠나고 나니 네게 잘해 준 것은 별로 기억이 나지 않고 못해 준 것만 자꾸 떠오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 나는 너로 인해 행복했고 너를 만났기에 내 삶은 의미가 있고 축복된 것이었어. 소중한 추억을 항상 기억하며 살고 싶구나.”(131-132쪽)
생의 의미는 이렇게 복원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조각난 것들이 다시 하나의 그림으로 돌아온다. 치유와 회복이다. 과정이 쉬운 것은 아니다.
“상실의 슬픔은 하루아침에 무디어지지 않는다. 시간이 필요하다. 결국은 시간이 기억을 지우면서 천천히 슬픔을 지워 갈 것이다. 그러니 사별 초기라면 지금 슬픔에서 벗어나려고 너무 애쓰지 마라…. 나는 버리고 싶었고, 아이들은 어미의 흔적을 안고 싶어 했다. 나는 피하고 버리면서 잊으려 했고, 아이들은 품으면서 잊으려 했을 뿐이다. 세월이 더 지나 어머니를 잃은 슬픔과 그리움이 잦아들면 언젠가 본인들이 직접 처리할 것이다.”(151, 154-155쪽)
사별자의 삶은 기력을 찾아간다. 그것이 사랑하는 배우자를 더는 슬프게 하지 않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는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도 마침내 꺼낸다.
“사별 후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고 해서 인간적 도리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며 죽은 배우자의 사랑을 배신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다시 사랑하는 것은 두려워하거나 죄책감에 빠질 일이 아니다.”(169쪽)
인간의 삶은 누구의 것이든 존중받아야 하며 그로써 다시 살아갈 길을 열어야 한다. 배우자의 죽음이 남은 이의 종착역이 아니다. 애도와 회복, 그 이후의 삶은 누구도 가늠할 수 없다. 그러나 고통의 사연을 하나 하나 내면화하면서 인간은 이전과는 다른 성숙한 인생의 지혜자가 된다.
“남편을 땅에 묻고 처음으로 친정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나는 큰 산과 같았던 아버지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평생 강한 분이신 줄 알았던 아버지는 남편을 잃은 딸로 인해 눈이 빨갛게 충혈되도록 우셨다.”(188쪽)
나만 울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 눈물 앞에서 사별자는 서서히 깨달아간다. “슬픔으로 인해 지금 내가 놓치고 있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202쪽)
상실했을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넘어져야 보이는 것이 있다. 보고 있다고, 알고 있다고 보는 것도 아니고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들 사별자들의 고해성사는 아직 그 길에 들어서지 않는 이들에게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삶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깨닫게 한다. 사별자들이 고통으로 토로한 이야기 속에 자신을 새롭게 발견한다. 그리고 이들의 이야기에 감사를 하게 될 것이다.
고대 그리스는 희극과 비극을 발명해냈다. 비극은 언제나 죽음과 마주하는 시간이다. 신들의 농간과 인간의 어리석음이 하나가 되어 비극은 탄생한다. 그러나 그 비극을 넘는 길을 이들은 갈망했다. 카타르시스는 그렇게 만들어진 언어다. 막은 비장하게 내리지만 극을 보고 흩어지는 관객의 마음속에는 그 다음 장면이 각기 이어질 것이다.
《나는 사별하였다》 역시 책을 덮고 나면 각자 다음 장면을 쓰기 시작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것은 가혹하지 않으며 어리석지도 않으며 결코 불편하지 않다. 그래서 이 책은 아프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고마운 책이다. 우리에게 자신의 사랑, 그 서사를 다시 쓰게 할 것이기 때문에.
김민웅/경희대 미래 문명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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