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가 굵게 잘 내렸는데도 값은 평당 500원. 허석분 할머니의 탄식이 길다. 강가 밭 당근이 전에 없이 잘 되었는데도 값이 곤두박질, 어이가 없는 것이다. 할머니 탄식 앞에 난 괜히 송구할 뿐이다.
윗작실 정영화 씨는 강가 밭에 배추를 심었다. 그런대로 잘 되어 통이 굵은 배추가 나란히 보기도 좋았다. 뜸하던 장사꾼이 그나마 들어오더니 밭 전체에 22만원, 그러니까 포기당 100원 꼴에 팔라고 했다. 화가 난 정영화 씨는 안 팔고 말았다. 여차하면 밭에서 얼려 죽이고 말일. 그래도 씨 값도 안 되는 그런 값엔 차마 팔 수가 없었다.
몇 군데 연락을 취했고 다행히 배추를 사겠다는 분들이 나섰다. 차를 마련해 원주 시내까지 싣고 나가야 한다. 여기저기 차편을 알아보고 사려는 이들과 값과 날짜를 맞춘다. 그러나 대강 뽑아보는 계산에도 차 운임을 빼면 액수는 턱없이 낮다.
이런 일이 정용화 씨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 건지. 뛰어들지도 외면하지도 못하는 이 어정쩡함. 이 땅에서 살아가는 또 한 번의 죄스러움.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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