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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얘기마을

넉넉한 은혜

by 한종호 2021. 5. 3.



절기예배 중 그중 어려운 게 감사절입니다. 기쁨과 감사가 넘쳐야 할 감사절을 두고 웬 우중충한 얘기냐 할진 몰라도, 아무래도 감사절은 어렵습니다. 그것이 맥추감사주일이건 추수감사주일이건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첫 곡식을 거두며, 혹은 온갖 곡식을 거두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예배에 왜 감사와 기쁜 마음 없겠는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괴롭고 안타까운 일들을 주변에 두고 때 되어 감사절을 맞아야 할 때도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새삼스럽게 감사의 조건과 감사의 이유를 찾아보지만, 그런 마음을 가로막고 나서는 안타까움이 바로 곁에 있습니다. 

지난번 맥추감사주일 예배를 드릴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내일이 감사절, 어떻게 감사 예배를 드리나, 바쁜 일철에 몇 명이나 모여 어떤 감사의 고백을 할 수 있을까, 미리부터 마음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텅 빈 자리 마주하며 평소의 주일보다도 어렵게 감사절 예배를 드린 기억이 적지 않은 탓입니다. 올해도 또다시 ‘비록 없을지라도’ 했던 하박국을 읽어야 하나, 언제나 다른 감사의 고백을 할 수 있을까 답답한 마음이 차올랐습니다. 

 

사진/김승범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종이와 크레용을 준비해서 제단 글씨를 쓰기로 했습니다. 스스로 기운이 빠져 최소한의 준비마저 빠뜨리면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냥 ‘맥추감사절’하는 것 보단 뭔가 감사의 의미가 담긴 글을 쓰는 것이 좋겠다 싶어 곰곰 생각에 빠졌습니다. 그러다가 생각해 낸 것이 ‘넉넉한 은혜’였습니다. ‘넉넉한 은혜’, 그건 어쩌면 믿음의 고백이라기보다는 간절한 ‘간구’였습니다. 작은 도화지에 글씨를 써선 제단에 걸었습니다. 넉넉한 은혜가 조그만 종이에 담겨 어찌 보면 초라하게 제단에 걸렸습니다. 

다음날 감사절이 되었습니다.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따라 한 분 한 분 교우들이 예배당으로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감자며 마늘이며 새로 찧은 쌀이며, 교우들은 각각 정성으로 구별한 곡식들을 제단에 올려놓았습니다.  


예배를 시작하기 전 찬송을 부르는데 문이 열리고 예배당으로 들어서는 두 분이 있었습니다. 작실에서 내려온 박수철 씨 내외였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부축을 받으면서도 한 걸음 떼기가 여간 어렵지 않은 박수철 씨가 아내의 부축을 받으며 교회를 찾은 것입니다. 


찬송을 부르던 교우 몇 분이 나가 박수철 씨를 도왔습니다. 예배는 또 한 번의 일렁임이 있은 후 시작이 됐습니다. 오원례 씨가 남편 이상옥 성도님의 부축을 받으며 예배에 참석한 것입니다. 당뇨와 교통사고로 몸과 마음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시력마저 거의 잃어버린 오원례 씨가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눈물을 흘리며 예배당으로 들어섰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한 후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예배를 준비하는 시간이었으면서도 교우들은 너무 큰 반가움에 오원례 씨에게 다가가 인사를 나눴습니다. 그 모습이 여간 소중하지 않았습니다. 


그 바쁜 철, 예배를 드리는 예배당엔 전에 없이 교우들로 꽉 찼습니다. 제단에 내걸린 글씨처럼 생각지도 못한 넉넉한 은혜가 우리를 덮고 있었습니다. 

-<얘기마을>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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