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저녁예배를 원주 시내에 나가 드리게 되었다. 성도교회 선교부 헌신예배에 설교를 부탁 받았다. 저녁 무렵, 차를 몰고 귀래 쪽으로 나가는데 용암을 지날 즈음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커다란 가방을 메고 있는 아가씨였다. 묘한 불신이 번져 있는 세상, 믿고 차를 세우는 아가씨가 뜻밖이었다.
아가씨는 뒤편 의자에 앉았다. 아무 말도 안 하며 나가는 것도 쑥스럽고, 그렇다고 뭐라 얘기하자니 그것도 그렇고, 무슨 얘길 어떻게 할까 하고 있는데 뒤의 아가씨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 한 목사님 아니세요?”
설마 나를 아는 사람? 룸미러로 뒤의 아가씨를 다시 한 번 쳐다보지만 아는 사람이 아니다. “저는 모르겠는데, 어떻게 저를 알죠?” 아가씨가 웃으며 대답을 했다.
“제가 목사님을 처음 본 건 중학교 때 버스 안에서였어요. 귀래중학교를 다녔는데 버스 안에서 어떤 아저씨가 책을 읽는 것을 여러 번 보았어요. 뭐하는 분이기에 버스에서 책을 읽나 궁금해서 친구들께 물었더니 단강교회 목사님이라는 것이었어요.”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 학생은 용암에 사는 학생이었고, 지금은 대학생이 되어 원주 시내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언젠가 한 번은 어떤 할머니가 고추 자루를 여러 개 가지고 버스에 탄 적이 있었어요. 할머니가 짐을 싣느라 혼나시는 걸 보면서 도와드려야지 마음은 그러면서도 나서질 못했어요. 왠지 창피한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뒷자리에서 누군가가 앞으로 나와 할머니 고추 자루를 받아 실었죠. 그 사람이 바로 목사님이었어요. 그때 굉장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어요.”
기억에도 없는 일을 그 학생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도 좋은 모습을 기억하고 있어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은근히 뜨끔했다. 저 학생은 또 무엇을 기억하고 있을까, 때때로의 내 모습을 유심히 바라본 그 학생의 기억 속에 혹 부끄러움으로 남아있는 모습은 무엇일까, 이런저런 이야기를 웃으며 나누면서도 생각은 그랬다.
언제 어느 때라도 부끄럽지 않게 살기! 남의 시선 의식함 없이 할 도리를 다하기! 난 새삼 마음속으로 몇 가지를 다짐해야 했다.
<얘기마을>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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