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웅의 인문학 산책(9)
애틋한 마음
중국이 18세기 청대의 소설 《홍루몽(紅樓夢)》으로 인간의 정과 그 별리(別離)의 아픔을 그려냈다면, 일본은 11세기 일본 왕실 내부의 애정소설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통해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낸다. 우린, 18세기 중엽 영-종조 시대에 《춘향전(春香傳)》으로 사랑을 그려 냈다.
동아시아 3국이 각기 사랑과 아픔과 그리움, 그리고 이별의 한을 풀어내는 방식이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데, 중국의 경우에는 채워지지 않은 사랑에 대해서 결국 달관하듯 초연히 스쳐 지나면서 표표히 떠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때의 꿈으로 간직하면서 홀로 아파하는 것이다.
일본은 그리움을 유독 깊게 간직한다. 오늘의 영화나 소설에서도 이 그리움은 환상의 세계를 설정해가면서까지 그 그리움의 대상과 끝끝내 만나게 하여 지상에서 그 한이 남지 않게 한다. 이 그리움은 죽음조차 이겨낸다. 그래서 찰나의 순간이라 할지라도 지상과 환상의 세계는 하나가 된다.
춘향전의 사랑은 상처투성이다. 핍박과 유혹의 손길과 고독을 그 사랑 속에 담고 있다. 주변에서 마구 흔들어 대 낭만의 여지를 갖기가 어려운 지점으로 몰린다. 정절(貞節)과 목숨이 하나가 되고, 자기를 지켜내는 은장도를 가슴에 품는다. 서로 간에 약속을 지켜낸 사랑은 결국 승리한다.
이젠 어쩔 수 없다고 여기고, 구름 속에 숨어버리는 달처럼 쓸쓸한 나그네가 되어 사라지는 사랑은 아프다. 환상에서라도 이루어내려는 처절함이 있는 그리움은 얼핏 행복하게 보여도, 아무래도 애처롭다. 인고(忍苦)의 세월을 이겨내면서 배신하지 않고 마침내 만나는 사랑은 힘겹지만 감격이 된다.
물론, 나라마다 반드시 이대로 사랑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해야만 그 나라 백성이 되는 것도 더군다나 아니며 법으로 명시되어 위반하면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이는 단지 대표적인 유형이 그렇다는 것이지, 사랑의 여러 모습들은 서로 섞여서 다채로운 곡절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런데 이 각기 다른 결을 가진 사랑 속에 똑같이 존재하는 것은 무엇보다 “애틋한 마음”이 아닐까. 가슴 깊은 곳에 아픔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아무 말 없이 떠나는 이나, 그리움이 환상이 되는 경우이든 온 세상이 자신을 위협해 와도 물러서지 않는 사랑 역시 모두 사랑하는 이에 대한 “애틋하기 그지없는 마음”이 시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즈음은 그런 마음을 품고 사랑하는 일이 부담스럽거나 구식이 된 모양이다. 잠깐의 흥미로운 상대를 고르는 흥분이 더 주도하는 세태인 듯 하다. 묘하게도, 몸을 겹겹이 감쌌던 시대는 상대에 대한 마음이 깊고 깊었지만, 노출이 일상화된 시대에는 드러난 몸이 우선의 목표가 되는 가 보다.
마음이 깊은 사람을 그래서 보기가 어렵고, 인간에 대한 그리움을 귀하게 여기는 이 또한 드물어간다. 이런 시대에, 우리 자신은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일까? 비가 내린 다음 날 오후, 바람은 선선한데 깊은 산, 맑은 물, 깨끗한 하늘이 우리 안에 성큼 들어왔으면 좋겠다.
김민웅/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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