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웅의 인문학 산책(10)
어깨 걸고 함께 가자!
박근혜 정권이 탈진상태에 이르렀다. 그렇게 된 것은 애초의 출발점이 수상했고, 대형 참사 앞에서 기능과 책임을 저버렸으며 부패세력의 정체가 폭로되는 사건들이 쌓이면서 권력의 국민적 토대가 무너져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현 정권의 정치적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세월호 1주기가 되는 시점에서 국민적 고통을 함께 해야 할 대통령이 모르쇠하고 해외로 빠져나가는 상식 이하의 일이 추진되고, 모법의 취지를 짓밟은 특별조사위원회 시행령을 버젓이 내세우는 몰염치는 왜 생기는 것일까? 그것은 집권세력이 얼마나 두려움에 처해 있는가를 보여주는 역설적 반증이기도 하다.
과거의 냉전정치는 공포를 통한 통제장치의 강화가 그 본질이었다. 북에 대한 두려움을 확산시키면서 자신들이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최적임자라는 것을 정당화해 온 과정이었다. 지금은 경제위기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특히 정치역량의 수준이 뛰어나지 못하면 해결의 돌파구가 열리지 않는다.
사회적 합의와 제도적 기능, 자원의 유기적 동원을 이루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한 정부는 자신의 권위를 지켜내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새로운 사건으로 곤경에서 탈출하고, 정작 짚어야 할 본질에 대한 국민적 시선을 계속해서 혼란에 처하게 하는 전술이 권력의 관성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너를 찌르는 것은 이 칼이 아니라 너 스스로의 과거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권력의 술책이 점점 더 통하지 않게 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권력의 은폐작전’은 ‘대중의 노출능력’ 앞에서 날이 갈수록 무력화되고 있으며, 거짓과 기만이 들통 나는 것은 거의 시간문제가 되어버렸다. 진실과 책임은 본래부터 정치의 영역이 아니라고 여긴 자들은 정치의 영역에서 생존이 어려운 상황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를테면 앙리 뒤마의 《몬테 크리스토 백작》에서 나오는 주인공 에드몬드 단테스의 저 유명한 대사, “너를 찌르는 것은 이 칼이 아니라 너 스스로의 과거다”처럼 되고 있다. 자신이 뱉어낸 말들과 행위가 자신의 현실을 거꾸로 가격하는 상황을 자초하는 권력의 되풀이 되는 정경은 그 권력이 겪게 될 몰락의 예고편을 보게 하고 있다.
체코 대통령을 지냈던 바츨라프 하벨은 “시민들이 진실과 책임에 대한 정치를 사고하기 시작하는 것은 권력의 음모와 술책에 대한 혁명적 반란”이라고 단언하면서 이는 “자신들의 삶에 대한 주체적 권리를 행사하려는 시도”라고 정의를 내렸다. 이와 함께 그는 “권력의 도덕성에 대해 민감해지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 기초”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하벨의 발언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에 대한 그의 실천적 확신과 철학에 기초한 토로이다. 그래서 그는 “정치란 권력투쟁을 위한 게임이 아니라, 의미있는 삶을 추구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이자 바로 이 삶을 지켜내고 이에 기여하는 실천적 윤리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 이웃의 인간을 인간적으로 돌보는 세상을 만들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진실에 복종하는 정치다”라고 갈파했다.
“권력의 개가 먹을 것은 개사료 뿐”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 억압적인 현실 아래 정치와 양심, 도덕을 지속적인 주제로 삼아갔던 하벨의 가치관은 오늘날 우리 현실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울림을 갖는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우리는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충격과 비애를 경험했다. 하지만 그것은 후퇴가 아니라, 우리가 이제 겨우 여기까지 밖에 못 온 것이었다. 진전했다고 여긴 것은 착각이었던 셈이고, 실제로 우리 현실의 고삐를 쥐고 있던 것은 다른 누구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상황이 종료되어가는 시점이 오고 있다. 박근혜 비판 전단을 뿌린 시민(박성수, 조성훈)이 일산 경찰서 앞에서 가진 기자회견은 권력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시민의 출현을 확실히 보여준다. 경찰은 그들에게 “남의 집 앞에서 왜 이렇게 하느냐?”고 한다. 남의 집? 아니나 다를까, 즉각 반격이 나온다. 경비과장이고 정보과장이고 이들에게는 일체 위협이 되지 못한다. “권력의 개가 먹을 것은 개사료 뿐”이라며 개사료를 뿌린 이들을 체포할 수 있는 법조항은 어디에도 없으니 어찌할 것인가?
공권력을 사유화하는 세력과 정부권력의 공적 책임을 따지는 시민의 대결에서 누가 옳은지는 그대로 판명이 난다. 그의 말과 태도에는 거침이 없다. 부당한 권력의 지침에 더 이상 복종하지 않는 시민의 수가 늘어나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한 혁명적 반란의 중대한 시동이 걸리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 당시 촛불광장의 동력은 사그라진 것이 아니라 정치적 패배 이후 성찰과 훈련의 기간을 겪으면서 새로운 방식과 힘을 가지고 다시 현실의 무대 위에 등장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세월호 유가족들의 정치사회적 성숙은 압권이다. 이들이 지난 1년 동안 겪은 고통과 슬픔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자식이 조직적 학살에 가깝다고 느낄 수장을 당한 것도 원통한데, 이후 겪어낸 어이없는 모멸과 비난은 이들을 좌절하게 하지 않고 도리어 강하게 만들었다.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해결책인지 이들이 제기하는 내용과 핵심은 여야 정치권 모두를 통 털어도 따르지 못할 수준에 이르렀다.
세월호 특별법에서부터 시행령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보인 역량은 존경스럽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인간적 존엄성의 가치를 견고하게 지키면서, 권력의 돈 장난과 언론 조작을 이겨내는 과정은 이 사회의 온갖 모순을 대신 지고 가는 존재의 장엄함이기 조차 하다. 우리는 이들에게서 우리사회의 진로가 어디로 바뀌고 있는지를 확실하게 본다. 고통을 겪은 당사자들의 각성과 행동만큼 지속적이고도 위력적인 것은 없다.
이에 비해 야당은 갈지자를 계속하고 있다. 천안함과 관련한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의 “북한 잠수함에 의한 폭침” 발언은 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온 적지 않은 국민들을 어처구니없는 사람들로 만들어 버린 것이자, 진실의 정치를 저버린 지지율 추수형 행동방식이다. 세월호 조사위 시행령의 문제가 확연하게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전면적인 문제제기와 강도 높은 공세를 제대로 취하지 않고 있는 것도 부자 몸조심이거나 정치적 전투력이 없다는 인상을 준다.
아직도 헤매고 있는 것일까? ‘가치의 정치’를 접는 순간, 자기 판단력을 잃고 주변의 눈치만 보는 정치를 하게 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이 중대한 현실 앞에서 입을 꼭 다물고 있는 야당 정치인들은 무엇을 위해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일까?
이제 필요한 것은 연대
프랑스 혁명의 구호는 “liberte, egalite, fraternite”였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형제애 또는 연대라고 번역될 수 있는 단어들이다. 공화정의 철학적 기초이자 사회적 가치의 선언이다. 우리도 이러한 공화정의 역사적 전통에 따라 민주공화국을 세운 나라이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인간과 인간사이의 사랑과 우애를 가로막는 일체의 것들은 구체제(앙시앙 레짐/ancien regime)라는 것을 선언한 것이자, 인류가 지향해야할 미래는 무엇인지를 밝힌 것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각기 독립적으로 따로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 자유는 개인별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특권은 존속한다. 자유가 발휘되지 못하는 사회에서 평등의 조건을 말하는 것은 위험해진다. 권력의 폭압 앞에서 개인은 약하기에 연대의 힘을 갖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어떤가? 자유는 제한적이며 특권은 지속되고 있으며, 불평등의 현실은 거론되지만 평등의 가치와 실천은 불온한 사상과 이념으로 몰린다. 연대는 불법시위규정과 제3자 개입불허라는 장치를 통해 봉쇄되고 있다. 민주공화국을 가로막는 앙시앙 레짐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해지는가? 당연히 혁명이다.
혁명을 꿈꿀 수 없고, 기대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고들 말한다. 그럴까? 혁명적 의식과 혁명적 인간이 출현하면 그것이 바로 혁명이다. 부당한 권력에 불복종하고, 부패한 집권세력에게 등을 돌리며 조작된 언론에 기만당하지 않고 고통당하고 있는 이들과 함께 하는 연대를 확산시키는 이들이 늘어나면, 그게 세상 바뀌는 일이다. 혁명의 양식과 방법이 달라졌을 뿐, 오늘 우리는 혁명이 절실한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세월호 유가족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함께 할 마음이 없는 권력이, 민심을 속이기 위해 애도의 쇼를 하는 것을 믿는 이는 더 이상 없다. 그건 분노만 키울 뿐이다. 대통령이건 총리이건 세월호 1주기를 맞아 팽목항에 백번을 간다 해도, 그간 유가족들을 그토록 고통스럽게 해놓고 이제 와서 그런들 상황 복구가 된다고 생각한다면 정신감정을 진지하게 받아야 할 상태라고 밖에 하지 않을 수 없다.
권력이 아픔에 대한 공감능력이 없다는 것은 그 권력의 영혼이 이미 부패했기 때문이다. 썩은 영혼을 지닌 권력이 지배하는 사회는 모두에게 재앙이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각자에게 답이 명료한 때가 아닌가?
김민웅/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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