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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

우리는 없이 살아도 염치를 알았고, 부끄러움을 알았다

by 한종호 2022. 4. 25.

지난 4월 23일 토요일, 실시간 평화의 촛불 행진 모습



언제부터 우리가 돈과 권력이면 다 되던 나라였던가?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내 어릴적에 본 동네 어른들은 그런 분들이 아니었다. 내 어릴적 함께 뛰놀던 땅꼬마들도 그렇지는 않았다. 우리는 없이 살아도 염치를 알았고, 부끄러움을 알았다.

온 동네 구석구석 뛰놀며 술래잡기를 할 때도, 같은 형제, 자매, 남매가 끼리끼리 같은 편이 되려고 하면 너도나도 나서서 큰 소리로 뜯어 말리며 먼저 편을 갈라놓고서 놀이를 시작하였다. 

같은 식구끼리 같은 편이 되면 장독대가 깨어진다며 놀려댔다. 그래서 아이들의 놀이에서도 제 가족은 같은 편이 되었던 적이 없었다. 동네 쪼무래기들도 그런 도리를 저절로 알았다. 

미국 검찰도 그 정도 쯤은 알고 있는 것 같다. 검찰이 수사권을 가지면, 검찰의 기소권에 신빙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대부분의 수사권은 경찰에게 있다고 한다. 대신 경찰의 요청이 있을 시에는 검찰이 도움을 주는 방식을 취한다고 한다. 그런데 대한민국 검찰은 언론의 눈과 입까지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며 최근까지도 국민들을 기만하고 있다. 

한국의 검찰은 그런 동네 쪼무래기들도 다 아는 세상의 순리와 법칙을 어겨가면서까지, 이 아름다운 세상을 혼탁하게 만들고 있는 주범이다. 그런 소인배들의 손에 법의 저울을 쥐어준 자가 누구인가? 민주공화국의 주권자인 국민은 분명 아니다. 이제 국민들의 뜻대로 수사권은 경찰에게, 기소권은 검찰에게로 나누어 사회교통질서를 바로 잡을 때가 온 것 같다. 

제 가족 범죄 감싸주기, 제 밥그릇 챙기기, 제 조직 범죄 덮어주기. 이런 세상에 천인공노할 소인배 짓거리로 제 배를 채우고, 필요에 따라서는 없는 죄도 만들어 억울한 누명을 씌워 그 옛날 불의 앞에 정의를 외친 대학생들을 고문치사로 죽이기까지 한 법고문기술자와 법살인자가 검찰인 것이다. 

아니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지난 주 대검찰청 기자실에서 사기범 '김건희 구속수사, 검수 완박'를 외친 다섯 명의 순전한 대학생들을 범죄인 다루듯 끌어내던 경찰은 과연 누구의 지시로 움직인 것인가? 내 아들 딸이 그런 꼴을 당했다 생각하니 치가 떨린다. 4·15 대학생 대검찰청 기자실 정의와 평화의 만세집회는 그 옛날 3·1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동경 한인 유학생들의 2·8 대한독립만세처럼, 그보다 더 앞선 도화선 북간도 대종교의 대한독립만세처럼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정의와 평화의 깃발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민주 시민들의 자발적인 응원과 쇄도하는 청원으로 바로 다음날인 4·16에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다.

봄꽃 같이 순하고 4월의 신록처럼 여린 우리의 아들 딸들이 나를 대신해서 그 대검찰청 기자실까지 들어가서 피켓을 하늘 높이 들며 마치 대한민국 만세처럼 이 땅의 정의를 외치다가 기습적으로 당한 공권력의 폭력을 지켜보면서 나는 지금도 잠을 자다가도 벌떡 벌떡 일어나서 분을 삭여야 한다. 

(내가 시시때때로 분을 삭이는 방편은 유튜브로 듣는 강의다. 노자 도덕경, 다석 류영모 아카데미, 도올의 불경, 수운 최제우의 동경대전 등이다. 윤석렬 당선 이후 나는 음악을 듣지 않는다. 내가 음악에 취해 안일한 가운데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는가 싶어서. 나는 본래 가족들의 잔칫날에도 술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는다. 안그래도 어둔 눈이 더 어두워질까봐. 그런데 누군 밤이면 술을 먹고 무슨 정신으로 정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술꾼 윤석렬의 입에선 거짓과 탁함이 들숨처럼 뿜어져 나온다. 선제 탄핵만이 답인 것 같다.)

검찰은 시종일관 정의와 민주의 피를 빨아 먹으며 제 뱃속을 채워온, 말도 안 되는 조직이 대한민국의 검찰 조직인 것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유지되는 검찰 조직이 언제 한 번이라도 그 철옹성 안에서 서로가 의기투합 하여 국민을 위해 순수하게 정의를 위해 일했던 적이 있던가? 묻고 싶다. 주어지는 월급만으로는 제 자식의 입시 고액 과외비와 부귀영화를 바라는 제 부모 효도 자금으로는 부족했던가?

이번에 윤석렬이 제 편으로 끌어들인 검찰 출신 일당들 제주도의 원희룡 시장의 그 많은 부동산, 울산의 땅도둑 김기현 시장, 보건복지부장관 후보자 아들딸 입시 비리 40년지기 정호영, 법무장관으로 지명된 핸드폰 비번도 안 푸는 카톡 300회 주고받은 김건희의 개 한동훈, 과연 무엇을 위하여 몸까지 바치겠다는 건지 의문인 김은혜.... 다들 제 부모와 사촌까지 그들이 소유한 땅과 재산은 왜 그렇게도 억억 소리가 나는 태산인지. 아직 청문회도 하기 전에 여기저기 두더지처럼 튀어오르는 비리들. 이 땅에서 가난하고 검소한 판검사가 있다면, 그런 사람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아는가? 성착취 피의자 조주빈이 수많은 피해자들로부터 강탈한 억대의 돈으로 무엇을 했는지. 나는 그 기사를 읽고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피해자들의 눈에서 피눈물을 짜내어 강탈한 그 돈을 자기 아버지께 쓰라고 드렸다고 한다. 조주빈에게 있어서 성착취 범죄는 효도의 방편이었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구속 중인 아들 조주빈에 대해 사과나 반성은커녕, 마녀 사냥이라며 끝까지 제 자식을 두둔하는 모습을 보였다. 마치 장모 최은순처럼 마치 딸 김명신(건희)처럼. 마치 검사 사위 윤석렬처럼. 그 가족 사기단들은 이미 서로가 서로만을 탐진치의 거울로 비출 뿐이다. 그런 그들의 눈엔 세상도 그렇게 혼탁하게 보일 테다.

조금 더 과거로 거슬러올라가 보자. 치욕의 역사로 기록된 을사늑약의 을사오적 중 그 이름을 듣기만 해도 능욕스런 이름 이완용은 어릴적부터 극진한 효자였다는 이웃들의 후문이 있다. 그 매국노는 나라를 팔아먹은 그 댓가로 일본으로부터 받은 남이섬과 일대의 땅을 제 자식에게 물려주었다. 그에게 있어서 친일 매국은 제 자식 사랑의 방편이었던 것이다. 나라를 팔아먹은 그 매국노가 숨을 거두기 전 그의 아들을 불러다가 유언으로 남긴 말이 유명하다. "이제 너는 친미파가 되어라. 앞으로는 미국이 득세할 것이다.", 국회의장 박병석은 제 가족과 사리사욕을 챙기다가 이완용처럼 역사에 치욕스런 이름으로 남지 않기를 끝까지 바라는 마음이다.

이제는 이 땅에 하나의 종교생활문화로 자리잡은, 이 땅을 살아가는 어머니들의 기도가 있다. 푸르게 돋아나는 4월의 신록 속에서 이제 머지않아 "부처님 오신 날"이다. 절에선 연중 내내 기도 행사가 끊이질 않는다. 예전에 신사동에서 요가 강사를 할 무렵 사무 업무를 보던 어느 학부모 불자로부터 얘기 하나를 듣고는 웃지도 못하고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슴에 풀지 못한 응어리처럼 가슴에 낀 떼처럼 남아 있는 한 마디가 있다.

고운 얼굴에 눈 밑에 기미가 잔뜩 낀 얼굴의 그 학부모는 자녀의 대학 입시를 위해서 강남의 봉은사에서 매일 새벽 천일 기도를 끝까지 드렸었다고 했다. 얼굴에 기미가 생긴 건 그 탓이라고도 했다. 자신이 다니던 봉은사 주지 스님이 새벽 천일 기도를 하러 다니는 신도들에게 너스레를 떨며 한 말. 이 나라에 입시제도가 없었다면 절은 다 굻어죽었을 거라고. 내 어린 귀에까지도 들려오던 "서울대 법대"가 단골 기도 제목이던 어둡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 나는 그런 기복의 기도를 드렸던, 제 자식만 아는 그런 탐진치에 눈이 먼 어머니들의 제 자식만을 위한 기도를 원망하고 있다. 

만약에 제 자식이 판검사이거나 제 자식이 언론인이거나 제 자식이 정치인이거나, 제 자식이 목회자인 그런 자식으로부터 받은 재물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어머니가 이 땅에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면, 꼭 물어보시라. "이 돈이 어디서 났느냐?"고, 땀 흘려 일하며 떳떳히 노력하여 받은 급여인지, 남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하고서 조주빈처럼, 최은순처럼, 김명신(김건희)처럼, 윤석렬처럼 착취한 뒷돈은 아닌지. 그저 돈이라면 권력이라면 다 좋은 게 아닌 줄 깨달으시라. 이 땅의 어머니들이여. 

지구에는 질량보존의 법칙이란 게 있다. 지구의 자원은 이미 한정되어 있어서, 한 쪽에서 과하면 다른 한 쪽은 부족하게 되어 있는 것이 이 땅의 이치다. 내게 불로잉여소득이 있다면, 그 돈은 분명 누군가로부터 빼앗은 착취물일 뿐이다. 

사색에 사색을 이어가다 보면, 그러한 상관관계 즉 석가모니가 말한 연기법이 언뜻 보이기도 한다. 모순되긴 하지만 내가 계란과 통닭을 못 먹는 이유가 병아리와 닭이 겹쳐져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어줍잖은 참선의 부작용이라 해야 할까. 여전히 삼겹살과 생선은  먹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내게 순수한 아이들은 말한다. 고기를 안 먹으면 다 안 먹어야지. 엄마는 말도 안 된다. 공부는 해도 해도 끝이 없다. 그래도 그냥 한다.

백일기도, 천일기도, 소원성취, 기왓장마다 빼곡히 적힌 가족들의 이름, 형형색색 연등의 꼬리마다 휘날리는 가족들의 이름. 지금 이 글을 적고 있는 필자도 생각해 보니 염치가 없다. 재작년 가을날 해인사의 법보전 앞에서 마음이 동해, 만원 짜리 꼬마 연등을 달면서, 가족들의 이름을 깨알 같이 적었더랬다. 이런 나조차도 국가와 나라의 이름은 늘 뒷전이었다. 이제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런 소인배 같은 나 자신이 어리석고 부끄럽다. 

교회를 다닐 때는, 6개월 정도 새벽기도의 제단을 쌓았던 경험이 있다. 설교단상 위에는 목회자가 있고, 늘 뒷자리에서 꾸벅꾸벅 졸며 피곤에 겨워도 자리를 지키던 사모와 하루라도 빠지면 성전이 무너지기라도 할 듯 열성이던 교회의 기둥 같던 장로들과 권사들. 그들과 나의 기도는 늘 똑같았다. 

나와 가정과 교회를 위한 기도가 주된 기도 내용이었다면, 비록 말뿐이긴 했어도 나라와 세계 열방을 위한 기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쭉정이 같던 기도의 말. 여기서 쭉정이 같다고 하는 이유는 그들이 취하던 세상을 향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2014년 세월호 사건이 터지고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던 토요일 오후, 교회 행사로 울산 남노회 초등부 야외 그림대회가 있었다. 노아의 방주는 언제나 인기 그림 주제. 내내 침울해 있던 나는 그러나 내가 기대했던 교사들의 입에선 단 한 마디도 세월호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다음날 주일 예배 목회자의 입에선 딱 한 줄의 언급이 다였다. "우리 교인들 중에 관련자가 있나?", ...침묵, "그러면 됐고. 에 오늘은..."(평소 목회자의 언어 습관이다. 굉장히 정치적이고 권위적이다.) 나는 세월호 소식을 접한 후 내내 가슴이 아팠고, 초등학생이던 두 자녀에게도 안타까운 얘기를 넌지시 비치면서 국가와 가족을 상실한 이들의 아픔에 마음 깊이 가라앉은 무렵이었다. 

그런데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 당시에 내가 출석하던 교회의 목회자를 위시한 전체 교인들의 반응은 전혀 뜻밖이었다. 자신들과는 아무 상관없는, 교회 성도들이 있는 곳은 노아의 방주가 되고 바깥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가 미치지 못하는 곳, 천국행 열차를 타지 못한 불신자들의 세상, 그래서 세월호 사건은 구원 받지 못한 딴 세상의 사건일 뿐이었다. 어쩌면 교회 조직으로부터 느껴지던 그 뼈져리도록 시린 세상을 향한 무관심. 그때 그런 경험으로 인해 내 마음이 건물 교회와 교회 조직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성경에서 본 예수는 그렇지 않았다. 나도 여느 교인들처럼 대충 목회자의 설교는 귓등으로 흘려버리고, 목마른 설교는 유튜브로 채우더래도, 교회 안에서 그저 그런 인간 관계만으로도 넉넉히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 앵무새처럼 반복되던 제 자녀를 위한 맹신의 기도, 사업 번창을 위한 욕심의 기도, 내세 천국을 위한 막연한 기도라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풍요와 안정에 안주하려던 내 가슴을 가만 놔두질 않는 건 신약 성서에서 만난 예수였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 그게 다가 아닌 것이었다. 돈과 권력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너희는 무릇 네 마음을 지키라...', 그 한 말씀이 별처럼 때론 태양처럼 환히 나를 비추며 날 꼼짝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학창시절부터 내가 보아 오고, 책 속에서 만나온 내가 동경하며 존경하는 분들의 삶의 이야기는 아무리 밤하늘 이 세상이 암흑천지라도 먼 별처럼 덤덤히 나를 비추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정양모 신부님의 <길 위에 인문학>을 듣다가, <다석 전기>에서 읽었던 내용을 신부님의 육성으로 거듭 확인하고는 또 다시 가슴이 뛰었다.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다석 류영모는 당시에 땅이 많은 부유한 집안의 장남이었다. 함석헌, 류달영, 김교신의 스승이기도 한 류영모, 그의 자녀들은 공부를 잘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류영모는 그의 자녀들에게 대학 교육을 시키지 않고, 대신 지게를 지도록 하였다. 대학 공부까지 하여 많이 배운 후 도둑질을 하며 사는 것보다 제 몸을 움직여 땅을 일구며 일하는 삶이 낫다고 하였다. 그가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천안 일대의 땅은 소작농들에게 나누어 준 후, 정작 제 자식에겐 물려줄 땅이 없어, 둘째 아들은 강원도의 화전민이 되었다.

지금까지도 입에서 입으로 가슴에서 가슴으로 회자되고 있는, 별처럼 아름다운 다석을 통한 예수의 마음, 이 땅을 비추는 하느님의 마음을 엿보는 것 같다.

비대해질 만큼 비대해진 한국의 대형 교회들은 이제 교회를 제 사유재산인냥 제 자식에게 세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물질의 부흥과 성장 뿐인 교회, 이미 정치와 기업이 된 한국의 대형교회는 윤석렬의 무리배들과 잘도 상통한다. 반면 윤석렬은 국민과는 여전히 시종일관 불통이다. 그 소인배들이 결탁하여 지난 주에는 울산의 땅도둑 김기현과 그의 일당들과 함께 여의도순복음교회 부활절연합예배에 참석한 기사를 보았다. 예전에 박근혜 탄핵 촛불 시민들에게 문을 열어주었던 서초동 일대의 주유소와 카페들과 식당들과는 달리, 그 커다란 사랑의 교회는 서리 맞은 꽃봉오리마냥 사방으로 그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세상의 아픔을 등진 전력이 있다. 

그 무리들에 더해 또 제 숟가락을 얹은 BBS불교방송국 (전)사장도 보았다. 예수를 팔아먹는 대형 교회 오정현 목회자를 존경하며 벤치마킹을 한다는 그도 역시 부처님을 팔아 먹으며 지금껏 제 부모와 집안이 호의호식을 누리고 있음을 두고 자랑으로 삼으며 그 물질의 풍요를 두고 부처의 가피라 여기며, 사진을 올리면서도 이미 그 자신은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저 혼자서 양복쟁이 그는 염치를 모른다. 눈은 낮은 데를 볼 줄을 모른다. 더 많이 더 높이 오르려고만 더 가지려고만 한다. 입으로는 부처를 팔면서도 분명 석가모니의 삶과는 다른 탐욕의 노선이다. 석가모니는 카필라 왕궁을 등지고 나온 후 길 위에서 비구로 살아간 나그네가 아니었던가. 

이 땅에서 예수와 석가모니의 시선이 향한 곳은 낮은 곳이었다. 낮은 곳에서 하늘을 우러르는 이들이었다. 천주교의 한 신부님이 조금씩 아껴 모은 돈을 그의 어머니께 용돈으로 드린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여전히 남루한 옷차림이었다. 알고 보니 그 돈을 자신에게 쓰지 않고 없이 사는 사람들한테 나눠준 사실을 뒤에 알게 되었다. 아들인 신부님은 처음엔 좀 화가 났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불쌍한 사람들이 눈에 아른거려서 차마 그 돈을 제 안일에 쓸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윽고 신부님은 짧았던 자신의 생각이 부끄러워졌고, 누군들 나조차도 그렇게 어지신 어머니를 향해 어찌 마음속 깊이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런 어진 마음이 이 땅에 산과 들처럼 유유히 흘러온 우리네 어머니들의 마음과 마음이 아니었던가. 둥근 박을 머리에 인 가난한 초가집 마당 한 구석 장독대에 정한수 한 그릇 떠 놓고, 밤하늘 둥근 달 하나면, 가슴 가득 차오르던 어머니의 순전한 마음이 그립다. 그 순전한 마음이 그리워서 나는 지난 주 일요일에 울산천도교교구를 찾았었다. 소박한 그곳에선 정한수 한 그릇을 떠 놓고 묵도와 묵송의 고요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친분이 있는 울산대 고래박사님이신 정의필 교수님의 설교가 있던 날이기도 했다. 거듭 언급하시던 비교종교학자 오강남 선생님의 심층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반가웠다. 

지금 대형 교회와 검찰과 윤석렬 일당은 시종일관 국민들과는 이처럼 등을 지고 있다. 세상의 어렵고 힘든 자들을 향하여는 무관심과 불통으로 일관해오고 있다. 그들은 권력과 돈을 붙들고서 뭔가 있는 체를 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없는 체 계신 분이시다. 교회 안에서 아무리 배가 불러도, 주일 학교 자녀들이 방긋방긋 떠들고 웃어도, 늘 내 가슴이 그랬듯이 어느 한 켠은 허전한 것이다. 우리 마음에는 돈과 권력, 부흥과 성장, 물질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없는 곳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없이 살아도 
염치를 알았고, 부끄러움을 알았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마음이 있어서

없이 있는 하늘처럼
없이 있는 텅 빈 마음을 
권력과 돈과 물질로 채우려 해도

없이 있는 마음은
있는 것으로는 도무지 채워지지 않아

없이 있는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건

없이 있는 하늘 뿐
없이 계시는 하느님 뿐

없는 것은
없는 것으로만 채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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