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비를 한껏 품은 장마와 무더위를 동반한 날씨가 오락가락한다. 그 사이 강렬한 햇빛이 작렬하여 바다에는 섬 사이에 해무와 윤슬을 만들어 낸다. 하루 사이에도 사뭇 다른 느낌이다. 빙하기와 빙하기 사이를 간빙기라고 한다. 이 시기에 지구환경은 격변을 겪게 된다. 지구 전체에 살아가고 있는 생명체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처절한 과정을 거쳤고 인류는 보다 나은 환경으로 이동하는 여정을 밟아나갔다. 태양계가 급격하게 팽창하거나 위축되는 우주적 주름살이 만들어지는 이 거대한 충격의 시간은 지구촌의 지층과 기후를 결정하는 때였고, 이로써 인류는 자연에만 의존하는 방식이 아닌 문명을 발명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도전과 응전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인류는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 셈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매우 새로운 상황에 맞닥뜨리고 있다. 온난화 현상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고되었고 이제는 실제로 우리가 경험하는 지구적 변화가 되었다. 과거의 계절개념은 무너져 내리고 있고 예측 불허한 여러 가지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오래 전 지구촌의 격변과 오늘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때에는 어디론가 피할 길이 있었고 그러면서 인류가 살아갈 지역이 만들어졌지만, 지금은 지구를 탈출하지 않고서는 살 길이 없게 되는 상황이 예견되고 있는 것이다. 온난화 현상은 지구 어디를 막론하고 영향을 미치고 있고 따로 피할 방법이 없는 환경재앙을 쌓아가고 있다.
급격하게 진행되는 사막화, 견디기 어려운 열대기온, 예고되지 않는 폭설, 대홍수와 해일 등은 지구촌 곳곳에서 계속 들리는 소식이다. 이는 우리가 이젠 안전지대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누군가가 지적했듯이 ‘불편한 진실’이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이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지 못하고 있다. 이 모든 재앙은 과거의 빙하기나 간빙기의 격변과는 달리 모두 인간의 인위적 죄악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발전이라고 여긴 일체의 산업화가 가져온 재난이다. 지구를 지켜내고 있는 오존층을 인간 자신이 구멍을 내고 보호막을 스스로 망쳐버린 결과이다.
기온이 달라지면 그건 다른 방법으로 막아낼 도리도 없고, 생태계 전반에 걸쳐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가 일어난다. 단지 기온이 몇 도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생태계 전반의 고리가 변하게 되고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의 근본을 흔드는 사태와 이어진다. 더 나아가서 이는 질병의 발생과 확산까지 가져오는 사건이다. 온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코로나가 단적인 예가 아닌가. 이보다 더 심각한 또다른 바이러스가 창궐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토록 중대한 문제에 대해 이미 세계 기후협약이 마련되어 노력해왔지만 그 진전은 미미한 형편이다. 산업이라는 이익에 묶여 인질이 된 지구촌의 생명이다.
자연을 개발의 대상으로만 이해하거나 그 안의 에너지를 뽑아내려고만 하는 발상에서 이러한 재앙은 시작된다. 건드리면 안 될 것을 건드려 인간 자신의 삶을 스스로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자동차 매연의 오염 정도가 아니다. 그것도 문제지만, 온실가스의 배출이 지구촌 전체에 걸쳐 팽창하면서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공해 해결능력을 넘어서고 있는 현실은 가공할 지경이다.
나무를 함부로 베어내고 숲을 깎아버리며 강을 뒤집어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일들이 곧 인류의 미래를 벼랑으로 밀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개발은 더 이상 자연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과 다르다. 땅을 인간이 살아가야 할 터가 아니라 투기와 개발의 대상으로 인식할 때 자연이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는 그 귀중한 자산은 파괴되어 갈 뿐이다. 자연이 일단 파괴되면 이를 회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걸 마음대로 파헤치고 뜯고 뽑아내고 질식시켜가고 있다. 썩지 않는 쓰레기를 묻고, 기후에 영향을 미칠 배기가스에 대한 통제를 가볍게 여긴다. 그 죄는 부메랑처럼 우리 인간의 현실과 미래를 겨냥하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가상의 미래를 놓고 벌이는 논란이 아니다. 현실에서 우리가 생생하게 겪고 있는 비극이다. 인류 전체가 경각심을 가지고 대응하려 노력해야 할 바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에 대해 기초적인 논란만 있지 실제로 지구 온난화를 막아내기 위한 작은 실천도 생활화되지 못하고 있다. 아마존의 숲이 사라지면서 지구의 허파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면 지구촌 도처의 작은 아마존 숲이 보호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러한 경고가 이미 시작되었는데도 한반도의 허파에 대한 민감한 각성이 없다.
그 각성의 부재는 이른바 4대강 사업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뉴스타파는 “강의 생명을 학살한 4대강 사업이라는 망령을 깨워 부활시키려 하고 있다‘고 질타하고 있다. 강을 손대는 것은 주변 숲을 망가뜨리는 일과 직결된다. 강을 손대는 것은 자연을 질식시키는 일에 그대로 이어진다. 그렇게 되면 지구의 숨결은 가빠지게 된다. 산업공해는 감당할 수 없이 자연의 회복력을 손상하게 함으로써 지구 온난화라는 재앙을 앞당기게 된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이에 대해 무덤덤하다. 경제적 계산만 따지고 있다. 이왕 따지려면 제대로 따져야 하지 않겟는가? 자연의 미래적 가치를 희생시키고 얻는 이익이 과연 얼마일까? 게다가 그 이익은 누구에게로 돌아가고 있는가? 골프장을 짓겠다고 산을 마구 깎아 우기에 그리도 재난을 자초하더니 강을 뒤집어 재난을 자초하고 있지 않은가?
지구 온난화도 애초에는 “뭐 별 일 있겠어?”로 시작했다. 하나님이 주신 자연을 이렇게 함부로 대한 죄는 과거에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의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 이 지구촌, 땅별이 더는 살 곳이 되지 못하게 된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우리 생전에 그런 일이 없다고 해서 후손의 권리를 미리 박탈해버리는 것은 또 옳은 것인가? 물을 마음 놓고 마실 수 없으리라고는 생각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누구도 물을 마음 놓고 마시지 못한다. 지금 지구촌이 인간이 살 곳이 되지 못한다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이런 생각도 계속 유지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지금 지킬 수 있을 때 지켜야 한다. 인간이 자기 위주로 파괴한 자연, 욕망을 채우겠다고 추진한 산업, 이 모든 것이 인간의 행복을 진정 만들 수 없음을 깨닫고 새로운 방향 선회를 해야 한다. 행복의 기준을 새로 잡아야 한다. 자연과 더불어 자족할 줄 아는 행복의 세계관이 담긴 “오래된 미래”를 되돌아봐야 한다. 계속 이러면 인간은 망할 수밖에 없다. 당장 자연을 인간의 욕망에 굴종시키는 오늘의 모든 논리와 결별해야 한다.
생명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할 때, 우리는 마침내 살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무지개도 쉽게 보지 못하고 하늘의 별도 제대로 못 보는 그런 메마른 세상을 살고 있지 않은가? 무지개와 별들이 무척 보고 싶은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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