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순례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수난곡No. 40
나의 예수여 편히 잠드소서
마태수난곡 2부 76~77번 마태복음 27:59~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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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듣기 : https://youtu.be/yopmoWY3_WY?si=xbxBYJ9s4yAc9TJq | |||
76(66) 내러티브 |
에반겔리스트 | 59.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60.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61.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62.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 59. Und Joseph nahm den Leib, und wickelte ihn in ein rein Leinwand. 60. Und legte ihn in sein eigen neu Grab, welches er hatte lassen in einen Fels hauen; und wälzete einen großen Stein vor die Tür des Grabes, 61. und ging Es war aber allda MARIE Magdalena, und die andere MARIE, die satzten sich gegen das Grab. 62. Des andern Tages, der da folget nach dem Rüsttage, kamen die Hohenpriester und Pharisäer sämtlich zu Pilato, und sprachen: |
대사 |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 | 63.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64.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 63. Herr wir haben gedacht daß dieser Verführer sprach da er noch lebete: Ich will nach dreien Tagen wieder auferstehen. 64. Darum befiehl, daß man das Grab verwahre bis an den dritten Tag, auf daß nicht seine Jünger kommen, und stehlen ihn, und sagen zu dem Volk: Er ist auferstanden von Toten; und werde der letzte Betrug ärger, denn der erste. |
내러티브 | 에반겔리스트 | 65.빌라도가 이르되 | 65. Pilatus sprach zu ihnen: |
대사 | 빌라도 |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 65. Da habt ihr die Hüter; gehet hin, und verwahret's, wie ihr wisset. |
내러티브 | 에반겔리스트 | 66.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 66. Sie gingen hin, und verwahreten das Grab mit Hütern, und versiegelten den Stein. |
77(67) 코멘트 & 기도 |
레치타티보와 합창 |
베이스 이제 주께서 안식에 드셨다 합창 나의 예수여 편히 주무소서! 테너 우리의 죄로 인한 그의 고난이 이제 끝났도다 합창 나의 예수여 편히 주무소서! 알토 오 복된 그리스도의 몸이여 보소서, 나의 죄가 당신을 고난으로 내 몬 것을 내가 이렇게 회개하고 후회하며 애통합니다 합창 나의 예수여 편히 주무소서! 소프라노 내 평생이 나의 영혼을 아끼사 구원하기 위해 당신이 당하셨던 고난에 무한 감사드립니다 합창 예수여, 편히 주무소서! |
BASS Nun ist der Herr zur Ruh gebracht. CHOR Mein Jesu, gute Nacht! TENOR Die Müh' ist aus, die unsre Sünden ihm gemacht. CHOR Mein Jesu, gute Nacht! ALT O selige Gebeine Seht, wie ich euch mit Buß und Reu beweine, Daß euch mein Fall in solche Not gebracht. CHOR Mein Jesu, gute Nacht! SOPRAN Habt lebenslang Vor euer Leiden tausend Dank, Daß ihr mein Seelenheil so wert geacht't. CHOR Mein Jesu, gute Nacht. |
무덤에 누이신 예수의 몸
예수께서는 무덤에 누이셨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용기 있게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달라 청했습니다. 예수의 몸은 깨끗한 세마포에 싸여 요셉이 자기를 위해 파 두었던 새 무덤에 누이셨습니다. 큰 돌이 무덤 문을 가로막았고 요셉은 그곳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차마 그곳을 떠나지 않고 앉아서 무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시간과 분량에 여유가 있었다면 이 부분에서 바흐와 피칸더는 무덤에 누인 예수의 몸에 관한 음악을 담았을 것입니다. 아쉽게도 마태수난곡에는 그와 같은 음악이 없지만, 예수의 수난을 더 깊이 묵상하기 위해 모차르트의 ‘Ave verum corpus/아베 베룸 코르푸스(K. 618)’를 떠올려 봅니다.
Ave verum corpus,
Natum de Maria Virgine,
Vere passum, immolatum
In cruce pro homine,
Cujus latus perforatum
Unda fluxit et sanguine
Esto nobis prægustatum
mortis in examine.
경배합니다 주님의 그 몸을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모진 수난을 몸소 당하셨으며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 옆구리는 창에 뚫렸고
물과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가 죽음의 시험 앞에 서게 될 때
그 몸을 기억하게 하소서
이 기도문은 중세시대부터 가톨릭 예전에, 특히 성찬식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이 가사에 두 번 쓰인 ‘verum’이나 ‘vere’는 ‘참으로’ 혹은 ‘진실로’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께서 우리와 똑같은 육신 그대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창 자국과 못 자국 그리고 채찍질...그의 몸에는 상처가 가득했고 쉴 새 없이 흘린 물과 피로 인해 그의 몸은 창백해졌습니다. 이 기도문의 ‘vere’라는 단어는 신성화되고 미화된 십자가가 아니라, 스위스 바젤에 있는 한스 홀바인(아들)의 그림 ‘Der Leib des toten Christus im Grab/무덤 속 그리스도의 몸’을 떠올립니다.
그의 몸이 그렇게 된 것은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그의 몸이 세마포에 싸여 무덤 안에 놓였습니다. 참으로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상처 가득 창백한 예수의 몸을 우리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모차르트의 ‘아베 베룸 코르푸스’는 음악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너무나도 귀한 인류의 유산입니다.
이 곡은 단 46개의 마디로 이루어진 짧은 모테트입니다. 반주도 오르간과 세 파트의 현악기(바이올린1,2&비올라)로 단출한 구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모차르트가 악보 처음 부분에 ‘Adagio/아다지오’라는 빠르기 말과 모든 파트의 시작 부분에 간곡히 당부하듯 ‘소토보체(Sotto voce/작은 목소리로)’라고 써 두었을 뿐 음악이 시작하여 끝날 때까지 악상의 변화는 없습니다. 모든 연주자와 듣는이가 상처 입은 거룩한 예수의 몸에만 오롯이 집중하라는 뜻이지요.
이토록 간결해 보이지만, 이 작은 곡은 제가 아는 모차르트의 가장 위대한 작품 중의 하나입니다. 모차르트가 비인 남서쪽 작은 마을 바덴에 있는 성 슈테판 성당에서 일하던 친구 안톤 슈톨(Anton Stoll)을 위해 이 곡을 작곡했을 때는 오페라 ‘마술피리’의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습니다. 너무나도 단순해서 모차르트의 초기 작품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모차르트의 ‘아베 베룸 코르푸스’는 그가 죽기 약 6개월 전인 1791년 6월 17일에 작곡되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해인 1791년은 모차르트가 백조의 마지막 노래처럼 클라리넷 콘체르토(K. 622)와 레퀴엠(K. 626)을 만들어내었던, 작곡가로서의 모든 역량을 불태웠던 해였습니다. 그 모든 것이 이 작고 조용한 곡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왠지 발랄하기만 할 것 같은 모차르트의 음악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입니다. 오히려 단순해서 더 위대하고, 짧아서 여운이 더 깊으며, 조용해서 그 울림이 더욱 크게만 들려옵니다. 이 음악을 통해 모차르트가 얼마나 진지한 신앙인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모차르트의 신앙과 음악적 능력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십자가 수난을 ‘참으로’ 겪으셨던 예수의 몸이 없었더라면 이토록 아름다운 음악은 결코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워낙 유명한 곡이고 연주하기 쉬워 보이기 때문에 이 곡을 담은 음반과 영상이 많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서 내려진 상처 가득하고 창백한 예수의 몸과 그에 담긴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한 연주는 베르트랑 드 빌리(Bertrand de Billy)의 지휘로 비인 소년합창단이 부른 영상입니다. ‘드 빌리’는 이 곡을 작곡할 때 모차르트가 이미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죽음을 깊이 느끼는 가운데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를 묵상하며 이토록 아름다운 음악을 남긴 모차르트를 향한 애잔함 마저 그는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2006년 비인 슈테판 돔에서 열린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 기념음악회에서 지휘자는 놀라운 집중력의 연주를 들려줍니다. 위대한 작곡가 앞에서, 그리고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 나오는 나무 성배처럼 예수의 보혈을 담은 그의 음악 앞에서 지휘자는 연주자로서의 욕심을 내려놓고 작곡가가 요청한 그대로 시종 ‘소토보체’를 유지하며 매우 느린 아다지오 템포로 연주합니다. 이 연주를 듣노라면, 어느새 음악도 사라지고 오로지 그의 거룩하신 몸과 보혈만이 부각됩니다.
https://youtu.be/spZ9FufCQT0?si=1my8cO2RQqUwif7S
바흐와 모차르트
아직도 바흐와 모차르트에 대한 몹쓸 선입관으로 가득하신 분들은 도무지 그 두 사람을 연결하는 접점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음악 교과서 속의 근엄한 바흐와 영화 아마데우스 속의 경박한 모차르트 말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두 사람의 성격은 반대였습니다. 바흐는 삶 가운데 유쾌함을 잃지 않았고 직선적인 성격을 주체하지 못해 인간관계의 갈등을 겪기도 했으며 심지어 동료와의 다툼으로 인해 구류된 적도 있었습니다. 반면 어릴 때부터 왕실이나 귀족들 앞에서 연주했던 모차르트는 상류층의 문화에 익숙했으며 그의 편지를 보면 매우 교양있고 신사적이며 진중한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종교와 신앙적인 면에서도 바흐에게는 그것이 사회적으로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기에 오히려 평범하다 할 수 있는 반면, 모차르트는 일찍이 잘츠부르크 대주교와 갈등을 겪으며 가톨릭 신앙의 형식적이고 세속적인 모습에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프리메이슨’과 바흐의 루터교 신앙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을 겪으면서 말년의 모차르트는 삶과 죽음, 그리고 신앙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했고 그런 그의 신앙적 성찰은 그의 마지막 대작들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공통점이 있는데 바흐와 모차르트는 공히 서양음악 역사상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닿아 있는 작곡가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바흐는 하나님을 찬양했고 베토벤은 하나님과 맞섰으며 모차르트는 이미 하나님 품 안에 있었습니다. 바흐와 모차르트는 교회음악이 아닌 장르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반면 베토벤은 그의 미사곡에서조차도 하나님과 씨름하고 있지요. 실제적인 역할은 다르지만, 바흐와 모차르트는 저의 신앙과 삶을 온전히 하나가 되게 해 주었습니다. 바흐는 찬양의 든든한 기초와 천상의 마천루가 되어 주고 모차르트는 그 공간을 가득 채워줍니다.
하루 중 저의 가장 충만한 행복의 시간은 피아노를 연주하는 시간입니다. 저는 그 시간을 ‘기도의 시간’이라 부릅니다. 하나님 품에 온전히 안기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어느새 저만의 성사가 되어버린 듯, 매일 아침 하루를 시작하면서 커피를 내려 피아노 옆에 두고 바흐와 모차르트 그리고 찬송가를 폅니다. 모차르트를 연주하노라면 야곱이 보았던 사다리처럼 땅과 하늘이, 음악과 신앙이, 몸과 영혼이 연결된 것 같습니다. 유독 모차르트만 그렇습니다. 다른 작곡가들의 곡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바흐의 음악조차 그 안에 인간과 하나님의 경계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다릅니다. 피아노 악보에는 거룩한 가사도 없고 모차르트는 다소 삐딱한 가톨릭 신자였음에도 그의 피아노 음악에서 기도를 체험하다니 참 신기한 일입니다. 그 느낌은 기도에 깊이 침잠했을 때의 느낌이나 하나님 품에 편안히 안겨 있는 느낌과 비슷합니다. 그 진중한 신학자가 이미 150년 전에 죽은 모차르트에게 편지를 썼다니 처음엔 의아했습니다. 하지만 목사가 되어갈수록, 모차르트를 알아갈수록, 칼 바르트가 모차르트를 왜 그렇게나 좋아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신학자로서, 목회자로서 문자와 생각과 말에 치인 삶을 살다 보니 굳이 신앙적인 내용을 담지 않고서도 그 무엇보다 신앙적인 모차르트의 음악이 좋았던 것이지요.
바흐와 모차르트는 서로 만난 적이 없습니다. 바흐가 죽고 6년 후에 모차르트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흐는 죽은 후에 너무나 빠르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습니다. 같은 해에 태어났던 헨델처럼 대외적으로 자신을 알리는 데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라이프치히 교회와 지역의 음악가로서 이름 없는 장인과도 같은 삶을 충실하게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격이나 종교, 음악 스타일 등 모든 것이 달라 보이는 두 사람, 바로크 음악을 대표하는 바흐와 고전파 음악을 대표하는 모차르트의 접점을 찾는 것은 무모한 일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를 듣는 중에 바흐를 느꼈습니다. 2막 후반부에서 갑옷을 입은 두 사람(Die zwei Geharnischten)이 등장할 때 바흐 특유의 푸가가 들렸습니다. 또한 마술피리에서 제가 가장 사랑하는 곡은 2막의 시작 곡인 ‘사제들의 행진/Marsch der Priester’인데 그것은 분명 바흐를 향한 모차르트의 오마주(hommage)였습니다. 모차르트는 분명 바흐를 동경했습니다.
1788년 작곡한 그의 마지막 교향곡 ‘주피터(Symphony No. 41 K. 551)’의 피날레 부분에도 바흐의 영향이 담겨 있습니다. 모차르트는 특히 1787년 5월에 있었던 아버지의 죽음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 후로 그는 급격히 쇠약해졌고 삶과 죽음, 하나님과 신앙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있었으며 이는 바흐의 음악에 대한 관심을 더욱 증폭시켜 주었습니다.
1789년 4월 모차르트는 바흐가 죽는 날까지 칸토르로 봉직하고 마태수난곡을 남겼던 라이프치히를 방문했습니다. 클라리넷 연주자 요한 요제프 비어(Johann Joseph Beer, 1744~1812)가 이끄는 음악회의 일원으로 참여한 것입니다. 그 일정 중에 모차르트는 바흐의 흔적이 남아 있는 토마스교회를 방문합니다. 당시의 토마스 칸토르는 바흐의 제자였던 요한 프리드리히 돌레스(Johann Friedrich Doles)였습니다. 그는 토마스 합창단과 함께 모차르트와 관객들 앞에서 바흐의 모테트 ‘Singet dem Herrn ein neues Lied/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라, BWV 225’를 연주했습니다. 바흐를 깊이 흠모했던 모차르트는 이에 찬사를 보냈고 그 곡의 악보 사본을 요청해서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사전에 조율된 것이 없었음에도 그 답례로 생전에 바흐가 사용했던 오르간을 한 시간 정도 연주했습니다. 그중에는 바흐의 코랄 ‘Jesu, meine Zuversicht/예수 나의 확신이시여(BWV 365)’도 있었습니다. 모차르트의 즉흥 연주를 들은 돌레스는 그의 스승 바흐가 부활했다고 생각하고 감격했습니다. 모든 분야의 고수들은 시대를 초월해서도 대화를 나누며 교감합니다. 바흐의 음악 유산은 모차르트에게 전해졌고 그의 음악 속에서 부활했습니다.
다시 등장한 사람들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는데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또다시 등장합니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사람들, 이제는 안쓰럽기도 하고 지긋지긋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요란스럽게 다시 등장하더니만 끈질기게 예수를 대적하며 예수 십자가 이야기의 중요한 역할을 했던 그들은 십자가 이야기의 뒷길로 슬며시 사라져버립니다. 과연 그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그들의 모습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남기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 예수를 죽이는 데 혈안이 되었다가 슬며시 사라졌던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그때처럼 비겁하게 숨어서 이름을 숨긴 채 예수와 그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을 가로막으며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방해하는 일에 열심히 애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힘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그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타공인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대적은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채 교회 안에 숨어 십자가를 폄훼하고 십자가를 대적하고 있습니다(눅23:34). 여기저기 십자가를 걸어놓고서는 정작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 십자가를 부적처럼 여기며 십자가를 건너뛰고 그 영광만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 예수의 사랑 받기만을 원할 뿐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 그저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일 뿐 결정적인 순간에 그리스도인이기를 주저하는 사람들, 예수 곁에 머물지 못하는 사람들....마태수난곡이 일깨워줬던 그러한 십자가 앞의 군상들이 오늘날에도 십자가를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모습입니다. 마태수난곡은 우리를 십자가 앞으로 이끌어 줍니다. 십자가 앞에 단독자로 서게 합니다. 하지만 십자가 앞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일어나는 일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께서 넓게 벌리신 그의 팔로 우리를 맞아 주시고, 안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진심 어린 고백이 흘러나옵니다. 예수를 판 것도 우리요, 우리가 예수를 못박았으며, 우리의 죄로 인해 그가 고난을 받으셨다는 고백 말입니다. 마태수난곡은 그와 같은 고백에 이르도록 우리의 손을 부드럽게 붙잡고 이끌어 줍니다.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한편,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목으로 건물을 세우고 온갖 조직과 율법을 만들었습니다. 성경을 그토록 열심히 공부했고 신앙생활을 그렇게 열심히 했음에도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깨닫지 못하고 그를 십자가에 내몬 것도 모자라 이제는 죽은 예수의 무덤을 지키게 합니다. 예수를 같은 시대에 눈앞에서 만나는 영광을 누렸음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그들의 참 구원자를 보지 못하고 예수의 길을 막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죄를 깨닫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우리가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한편, 그들은 제자들이 시체를 도둑질하여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할 수 있기에 사흘까지 무덤을 굳게 지켜야 한다고 빌라도에게 말합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남성들이었습니다. 오페라였더라면 당연히 그들의 대사가 남성합창으로 작곡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페라와 달리 수난곡의 합창에 소프라노가, 그것도 어린 소년들의 목소리로 들어간 것은 그 남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들과 같은 죄인임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부활의 증거를 더 명확하게 세워 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들이 무덤을 지켰음에도 예수는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의 길을 가로막으려는 그들의 발악은 예수의 십자가가 그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승리로 이어짐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 군병들이 십자가 위에 내 걸은 명패가 예수께서 왕이심을 선포하고, 예수를 멸시하는 이들의 조롱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했듯이 그들은 예수께서 사흘 후에 살아나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역설입니다.
한편, 63절, 그들이 합창으로 노래하는 예수의 말씀을 들어 보면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Ich will nach dreien Tagen wieder auferstehen”라는 말씀이 베이스-테너-알토-소프라노 순으로 순차적으로 상행하며 예수의 몸이 실제로 부활하여 일어나는 모습을 신비롭고 영광스럽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돌로 막혀버린 무덤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빈 무덤으로, 예수 부활의 최후 승리로 완성됩니다. 그들은 온갖 인간적인 방법으로 예수의 흔적을 지상에서 없애 버리고자 발버둥 치지만 결국 그들은 십자가의 다음 이야기, 부활을 예고하는 역할을 합니다.
나의 예수여 편히 잠드소서
이어서 네 명의 솔리스트와 합창이 함께 예수께 마지막 인사를 전합니다. 정말 아름다운 엔딩입니다. 저도 모르게 무덤 속에 누워 계신 예수를 향해 함께 손을 흔들어 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마태수난곡에서 솔로를 맡았던 솔리스트들이 베이스-테너-알토-소프라노 순으로 무덤에 누이신 예수를 바라보고 각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이야기에 동참하며 깨닫게 된 마음을 표현합니다. 그 표현들은 점점 확장되어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인식-그의 죽음의 의미-회개와 후회와 애통의 마음-십자가 구원에 대한 감사’로 이어집니다.
이에 합창단은 모두 함께 반복하여 ‘Mein Jesu, gute Nacht!’ 라고 응답합니다. ‘gute Nacht/구테 나흐트’는 말 그대로 ‘굿 나잇’으로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나누는 밤인사입니다. 죽은 자에게 하는 인사가 아니라 이제 모든 고난이 끝났으니 ‘나의 예수여 이제는 푹 쉬시고 깨어서 다시 만나요’는 의미입니다.
이 장면은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동방박사의 경배를 떠올리게 해 줍니다. 예수의 생애를 수미쌍관의 안목으로 바라보게 해 줍니다. 예수께서 나셨을 때 동방박사들이 차례로 나와 말구유 아기 예수께 경배했던 것처럼 마태수난곡을 정성스레 노래했던 솔리스트들이 한 명씩 나와 돌무덤 위에 누이신 예수의 시신에 인사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모든 합창과 악기가 함께 합니다. 말구유와 십자가 그리고 돌무덤....그의 삶 자체가 십자가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그의 삶을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과 우리를 향한 온전한 사랑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강보에 싸인 말구유의 아기로 오신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몸소 다 겪고 나서야 이렇게 세마포에 싸여 아기처럼 무덤에 누워계십니다. 이제야 주님은 안식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도, 그분으로 인해 참된 안식을 얻었습니다.
Habt lebenslang vor euer Leiden tausend Dank,
Mein Jesu, gute Nacht!
주님, 당신이 당하신 고난에 감사합니다.
나의 예수님, 이제는 편히 쉬세요!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현재 전농교회 부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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