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순례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수난곡 No. 41
편히 쉬소서 지치신 몸이여
마태수난곡 2부 78번 | |||
음악듣기 : https://youtu.be/A8ZB4cVuVJE?si=nMS7J8Z1fdi6b9jU | |||
78(68) 코멘트 |
합창 |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앉아 무덤에 계신 당신을 향해 외칩니다 편히 안식하소서, 편안한 안식을 얻으소서! 편히 쉬소서 지치신 몸이여 편히 안식하소서, 편안한 안식을 얻으소서! 당신의 무덤과 묘비는 두려워하는 마음에 편안한 보금자리가 되고 영혼의 안식처가 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지극한 만족 가운데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습니다 |
Wir setzen uns mit Tränen nieder Und rufen dir im Grabe zu: Ruhe sanfte, sanfte ruh'! Ruht, ihr ausgesognen Glieder! Ruhe sanfte, sanfte ruh'! Euer Grab und Leichenstein Soll dem ängstlichen Gewissen Ein bequemes Ruhekissen Und der Seelen Ruhstatt sein. Höchst vergnügt schlummern da die Augen ein. |
마태수난곡의 마지막 노래
1727년 4월 11일 금요일 이른 저녁, 독일 라이프치히의 토마스교회에서는 오후 두 시 경부터 시작되었던 성금요일 예배의 마지막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열흘 전에 마흔 두 살 생일을 맞았던 토마스교회의 칸토르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오르간을 연주하며 지휘를 하고 있습니다. 오르간을 함께 연주해야만 했기에 손과 발에 제약이 있었고 요즘과 같은 전문적이고 화려한 지휘 동작도 없었지만 모든 합창단원과 연주자들은 바흐의 엄격한 훈련과 그가 만든 감동적인 음악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기에 그의 오르간 소리와 표정 그리고 작은 몸짓만으로도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1부와 2부 사이에 있던 설교를 포함하여 세 시간이 넘게 흘렀고 어느새 마지막 곡이 시작되자 모든 합창단원과 연주자들은 하나 같이 마음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뜨거움을 느낍니다. 서서히 마음을 타오르게 하는 오케스트라 전주에 이어 일렁이던 눈물이 터져 오르는 듯 합창의 첫 소절이 울려 퍼지자 그 울림이 토마스교회 예배당을 가득 채웁니다.
토마스교회
1160년경 그 토대가 세워진 라이프치히 토마스교회는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까지 가톨릭 성당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예수와 그의 십자가를 향하게 하는 공간적인 느낌과 시각적 이미지로 가득했습니다. 토마스교회는 라이프치히에서 두 번째 큰 교회로 독일 전역에서 가장 화려한 기둥을 자랑하는 라이프치히 니콜라이교회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그 위상이 딸렸지만 경건하고 순수한 신앙심이 깃든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습니다.
천정을 가득 채우고 있는 붉은색의 ‘망형늑재궁륭(Das Netzrippengewölbe)’은 토마스 교회를 대표하는 이미지입니다. 고딕 양식을 대표하는 이 건축기법은 아치(arch)에서 발달 된 반원형 천정을 의미하는데 토마스교회는 ‘망형늑재궁륭(網型肋材穹窿)’이란 이름 그대로 아치에 덧댄 내부 천정의 모양이 그물과 갈빗대를 닮았고 하얀 바탕 위에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습니다.
유럽 여기저기에 있는 거대한 예배당에 비하면 소박하기 그지없지만, 바흐의 숨결이 살아 있는 라이프치히 토마스교회는 특별한 영적 아우라를 뿜고 있습니다. 특히 그 천정의 붉은 부분은 보이는 각도에 따라 나무 십자가처럼 보이기도 하고 하얀 부분은 거친 끌로 파낸 말구유를 연상케 합니다. 이처럼 토마스교회는 겸손하게 말구유의 아기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노래하는 마태수난곡이 울려 퍼지기에 가장 이상적인 공간이었습니다. 토마스교회 예배당은 작은 아기 예수가 태어날 때 그를 가득 품어 주었던 말구유처럼, 그리고 청년 예수가 사형을 당할 때 상처 가득한 그의 온몸을 떠받들었던 십자가처럼, 마태수난곡 초연의 역사적인 장소가 되어 주었고 그 첫 번째 연주의 처음과 끝을 함께 해 주었습니다.
합창단과 모든 악기 연주자들이 만들어 낸 음악 소리는 지금까지 설명한 라이프치히 토마스교회의 공간을 가득 채웠습니다.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기에 연습할 때처럼 풍성한 울림이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 소리는 같은 공간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서 또 다른 공명을 만들어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죽기까지 사랑했던 그의 사랑이 만들어낸 카타르시스가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의 마음과 영혼을 정결케 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울림은 마지막 곡에 이르러 그들의 눈물에도 투영되었습니다. 만일 누군가 제게 음악사의 모든 장면 중에 가장 함께하고 싶은 순간이 있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주저 없이 1727년 4월 11일 금요일 라이프치히 토마스교회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바흐가 지휘하는 마태수난곡이 세상에 처음 울려 퍼졌던 그 날 그 곳 말입니다.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앉아
Wir setzen uns mit Tränen nieder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앉아
마태수난곡의 마지막 곡의 첫 번째 가사가 울려 퍼집니다. 이 합창곡은 예수의 시신이 장사 되고 모든 사람이 다 떠나가 버렸을 때 무덤의 예수 곁에 끝까지 남아 그를 향하여 앉아 있었던 두 여인을 다시금 소환합니다.
und ging Es war aber allda MARIE Magdalena, und die andere MARIE, die satzten sich gegen das Grab./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마태복음 27장 61절
마태수난곡이 전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십자가 예수 곁에 머물라’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었지요. 그 메시지는 마지막으로 또 한 번 강조되어 이제는 메시지와 교훈을 뛰어넘어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의 ‘고백’이 되어 울려 퍼집니다. 이렇게 바흐의 교회음악은 그 어떤 종교 음악보다 우리의 마음속 더 깊은 곳을 파고듭니다.
마지막 노래의 첫 가사, 이 구절의 번역이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아래로’라는 의미의 ‘nieder’라는 단어 때문인데 이 단어가 ‘sich setzen(앉다)’과 연결되어 ‘주저앉다’ 혹은 ‘무릎 꿇고 앉다’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고 ‘Tränen(눈물)’과 연결되어 ‘눈물을 아래로 흘리다’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감성적 표현이 출중했던 마태수난곡의 대본작가 피칸더는 분명 그 두 가지 모두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가 남기고 싶었던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예수 곁에 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곁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 베푸신 구원을 감사와 경배의 마음으로 묵상합니다. 우리는 또한 예수께서 실제로 겪은 십자가의 고통과 그 고통에 담긴 지극한 사랑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이 노래를 부릅니다.’
당신을 향해 외칩니다
Und rufen dir im Grabe zu:
무덤에 계신 당신을 향해 외칩니다
무덤 앞의 여인들은 그저 그 무덤을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었지만 우리는 그의 죽음의 의미를 알며 그의 죽음 이후의 부활 승리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활 이전에, 예수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이 그 자체로 여전히 가슴 아프고 슬픈 일이었습니다. 그가 ‘참으로’ 고난을 겪었기 때문이며 그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부활을 알면서도 그의 고난과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이제는 절망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독일어 동사 ‘rufen/루펜’은 ‘부르다’라는 의미인데 그 앞에 ‘zu’가 붙어 ‘zurufen’이 되면 ‘큰소리로 외쳐 부르다’라는 뜻이 됩니다. 두려움과 상실감에 멍하니 앉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향한 고마움과 그리움과 안부와 사랑을 담아 큰소리로 무덤 속의 예수를 향해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Ruhe sanfte, sanfte ruh'!
편히 안식하세요, 편안한 안식을 얻으세요!”
한편, 마지막 합창의 가사 중간에는 다음과 같은 고백이 있습니다.
Euer Grab und Leichenstein
Soll dem ängstlichen Gewissen
Ein bequemes Ruhekissen
당신의 무덤과 묘비는
두려워하는 마음에 편안한 보금자리가 되고
안식처가 됩니다
무덤(Grab)은 십자가의 고난과 예수의 죽음을 상징하고 묘비(Leichenstein)는 그것의 영적인 의미를 상징합니다. 마태수난곡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의 무덤과 묘비 모두를 깊이 묵상합니다.
아마 독일인들은 이 가사가 어디에서 왔는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속담은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혹은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일 것입니다. 저마다 ‘말’과 관련된 속담입니다. 반면 말보다는 마음과 생각을 더 중시하며 양심이 바르고 정직하기로 유명한 독일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속담이 있습니다. ‘Ein gutes Gewissen ist ein sanftes Ruhekissen’입니다. 그 의미는 ‘마음이 올바르면 잠자리가 편하다’입니다.
이 속담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개의 명사 ‘Gewissen(마음)’과 ‘Ruhekissen(베개, 잠자리)’이 이 가사에 그대로 쓰였습니다. 또한 속담에서 그 명사들을 수식하는 형용사는 ‘gutes(좋은)’가 ‘ängstlichen(두려워하는)’로 바뀌었고 ‘sanftes(부드러운)’가 ‘bequemes(편안한)’으로 바뀌었을 뿐 전체적인 문장은 동일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흥미롭긴 하지만 잘못하면 유치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이와 같은 시도를 피칸더가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속담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속담에는 오랜 세월을 견뎌낸 힘이 있습니다. 피칸더는 이 속담을 변형하여 독일교회 성도들에게 쉽게 와 닿고 쉬이 잊히기 어려운 마지막 메시지를 남겨 주고 고백하게 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의 십자가로 인하여 이기심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우리의 마음이 평안과 안식을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단순하며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또한 마태수난곡은 그저 고상한 클래식 음악이 아닙니다. 바흐의 마태수난곡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그 신앙의 중심인 예수의 십자가를, 십자가의 열매인 평안과 안식을 알게 하고 누리게 하는, 인류를 향한 영혼의 선물입니다.
‘Passion’의 의미
바흐의 악보 원본과 글자체를 보노라면 그 자체로 캘리그라피 작품을 보는 것만 같습니다. 바흐는 마태수난곡 원본의 표지에 멋진 라틴어 필체로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Passio Domini nostri J.C. secundum Evangelistam Matthäum’ 번역하면 ‘마태복음에 따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입니다. 라틴어 ‘Passio’는 ‘그리스도의 고난’이란 의미 외에 여러 가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먼저, 서양음악사의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바흐의 마태수난곡으로 인해 ‘Passion’은 어느새 ‘수난곡’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또한 라틴어 ‘Passio’는 고난, 열정, 사랑, 사건, 감정, 헌신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바흐의 마태수난곡에는 ‘Passion’의 모든 의미가 다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 의미들을 조합하여 오늘날 우리를 향한 마태수난곡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태‘수난곡’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이라는 ‘사건’을 통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원을 향한 그분의 ‘열정’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수난곡’을 통해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감정’적으로 동참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랑’을 다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로 상징되는 예수를 따르고 예수를 닮아가는 삶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마태수난곡의 마지막 합창곡의 가사는 ‘Ruhe sanfte, sanfte ruh/편히 안식하기를, 편히 잠드시기를’입니다. 모든 위대한 작품은 웅장하고 화려하게 끝나고 싶어 합니다. 헨델이 작곡한 메시아의 마지막 곡인 ‘아멘’ 합창 뒤에는 뜨거운 박수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공연장에서 헨델의 ‘메시아’를 듣는 이들에게 주된 이슈는 음악 자체에 있지 않고 ‘할렐루야’가 울려 퍼질 때 일어서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래저래 눈치를 보다가 결국 음악에 집중하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물로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듣는 사람의 마음에 달렸지요. 하지만 마태수난곡은 끝까지 무덤 속에서 말구유의 아기처럼 잠들어 있는 예수께 집중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대장정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점점 p-pp로 작아지면서 조용하고 담담하게 마무리됩니다.
마태수난곡의 처음 합창곡은 ‘어린 양을 보라’였습니다. 마태수난곡은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시고 죽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께 집중하고 있습니다. 참, 수난곡의 전통에서는 모든 연주가 끝나고 박수를 치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 또한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태수난곡은 전통을 따지기 이전에 박수를 아예 잊어버릴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집중케 함으로 마무리됩니다. 박수 대신 그 여운을 최대한 깊이 누리면서 조용히 기도하거나 하나님의 사랑을 담고 있는 마태수난곡의 마지막 음악 소리인 ‘침묵’에 침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순례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동안 동행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들도 이제,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안식 가운데 우리 함께 그의 부활을 기다려야겠습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현재 전농교회 부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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