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

김민웅의 '인문학 산책' 2015. 5. 13. 16:41

김민웅의 인문학 산책(13)

 

무진기행

 

 

스물 세 살의 청년이 쓴 글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김승옥의 《무진기행(霧津紀行)》은 지난 세월, 수많은 문학 지망생들에게 하나의 교과서처럼 되었습니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세려된 문체는 60년대 문학의 우울함을 뚫고 자신을 비추는 투명한 거울이기도 했습니다.

 

무진은 이름 그대로 “안개 나루터”입니다. 김승옥의 글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훗날, <안개>라는 이름으로 영화가 되기도 한 이 작품은 김승옥이라는 작가가 통과하고 있던 정신적 방황과 급속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던 당대의 현실을 투영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안개 같기만 한 상황은 사실 그가 가장 정직해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의 아내는 그의 안색이 편치 못한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안색이 나빠서 큰일 났어요. …무진에 며칠 동안 계시다 오세요. 주주총회 일은 아버지와 저가 다 꾸며놓을께요. 오랜만에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돌아와 보면 대 회생 제약회사의 전무님이 되어 있을 것이 아니예요?”

 

 

 

                             사진 김승범

 

안개라는 적군에 포위된 자리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주인공은 그 안개를 헤치고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집니다. 출세를 향한 도시의 집념과 야망에 지쳐있는 그에게 아내는 무진이 잠시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무진은 그녀에게 다만 시골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그 무진이 자신을 무진의 그 시절로 돌이켜 놓을 수 있지 않을까 몰래 기대합니다. 그곳에서 만난 한 여인에게 주인공은 편지를 씁니다.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저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계속 말합니다.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다 놓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였듯이 당신을 햇볕 속으로 끌어 놓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할 작정입니다. 저를 믿어 주십시오.”

 

그러나 그는 편지를 다 쓰고는 그걸 찢어버리고 맙니다. 그는 어느새 서울 행 버스를 타고 있었습니다.

 

작품은 이렇게 마무리 지어집니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서 나는 어디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무진의 그 옛날로 돌아가지 못하는 자, 또는 무진의 시절을 잊어버린 자들의 운명입니다. 그 부끄러움조차 잊은 자들도 있습니다. 한 때 무진의 안개를 가난하게 헤쳐 왔다가 지금은 권력이 된 이들도, 어디 무진을 한번 다녀오시지요.

 

김민웅/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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