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호의 너른마당(18)
역사와 현실을 외면한 영성의 무기력함
모든 생명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시간과 더불어 명멸(明滅)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를 알고자 하는 것은 그 생명의 시간이 기록해놓은 의미를 되새겨보고 그 위에서 성장하고자 하는 갈망에서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역사에 대한 되새김이 없는 존재는 그 생명의 성장을 바라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므로 역사에 대한 앎을 억압하는 것은 생명을 억압하는 것과 같다.
진시왕이 분서갱유(焚書坑儒)를 통해서 역사를 짓밟으려 한 것은 생명을 멸시한 소행이었고,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그 자신의 역사적 생명을 단축시키고 말았다. 이는 무엇을 말함인가? 역사에 대한 통찰력과 안목을 기르지 못하는 인생과 공동체는 그 생명을 새롭게 발전시키는데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역사에 대한 되새김,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신앙의 길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인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존재하는 나 자신의 개인적 실존에 주목하게 한다. 창세기 이후의 성경은 그런 측면에서 인류적 통사(通史)이며 이 통사적 맥락에서 ‘나는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사 속에서 활동하신 하나님의 모습은 이스라엘 민족 개개인의 구체적인 실존적 삶과 분리되지 않았으며, 도리어 이를 망각하는 것을 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억하라, 기억하라”고 명하신다. 망각이 죄가 되고, 역사에 대한 되새김이 없는 신앙은 하나님의 섭리에 눈이 어두워지는 길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구약의 선지자들 역시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 실존의 역사성을 주시하게 한다. 지금 당장 한 개인의 짧은 인생 여정만 생각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가, 긴 역사의 여정에서 바라보면 알게 된다는 이들 선지자들의 혜안은 역사와 현실, 그리고 개인의 삶을 가치 있게 일구어 내는 영성 사이에 어떤 관계가 맺어져야 할 것인지를 일깨우고 있다.
선지자들이 범인(凡人)들이 놓치고 살아가는 역사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다면, 이들의 영성은 매우 민감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지구는 자전하며 공전하고 있으나 아무도 이를 체감(體感)하지 못한다. 그 안에 있으면 그 움직임의 거대한 축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이 거대한 축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는 존재이다. 그만큼 그들의 영이 맑고 투명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세상에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는 때에 멸망과 번영의 갈림길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투시(透視)할 수 있고 그 축의 떨림을 듣는다.
그렇지 못한 무수한 사람들은 대세의 흐름 속에 휩쓸려가고, 그 실존의 자리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일에 아무런 반성 없이 따라가지만, 영성이 뛰어난 선지자들은 이에 저항하고 이겨내는 길을 제시한다. 그러기에 역사와 현실에 마주하지 않는 영성은 무기력할 뿐만 아니라 참된 의미의 영성이 아니다. 자신이 타고 있는 배의 운행과 그 운명을 알지 못하고 그저 배안의 객실이 일등석인지 이등석인지를 따지면서 자신의 운명을 가늠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침몰하는 배의 일등석은 힘차게 항해하는 선박의 삼등석과 비교할 수 없다.
예수님은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이 영의 맑고 아름다움이 하나님 나라를 보고 소유하는 일의 핵심적인 관건인 것을 밝히신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외치신 그분의 음성은 역사와 현실이 하나님 나라의 뜻과 만나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것과 분리된 하나님 나라는 없다. 이스라엘 역사의 비극성을 목격하고, 이 비극적 사태의 반전 내지는 역전을 꾀하는 하나님 나라의 혁명적 도전은 한 개인의 실존적, 내면적 영성에서부터 출발하여 그것이 공동체적 현실이 되는 지점에까지 가는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둘, 셋이라도 모인 자리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역사란 ‘홀로의 고독한 실존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임재(臨齋)’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적 확대를 뜻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장막을 치셨다)”는 요한복음의 증언은, 다름 아닌 역사와 현실, 그 안에 녹아들어 새로운 생명력으로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지목하는 말씀이다.
류연복 판화
구체적인 역사와 현실 속에 몸이 되는 영성
구체적인 역사와 현실 속에서 몸이 되지 않는 영성은 관념이며 추상이고 허상에 불과하게 될 뿐이다. 생명은 관념과 추상, 허상이 아니라 오늘의 역사와 현실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현존(現存)이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한국교회는 영성과 역사, 영성과 현실이 조우(遭遇)하는 작업에 소홀히 해왔다. 아니, 소홀히 해왔다기보다는 오히려 무시했고, 이 작업에 반대해 왔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역사의 문제를 제기하고, 현실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영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도외시했다. 심지어는 영성이 흐려지는 것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교회가 우리 사회 전체가 영적으로 타락하고, 죄에 무뎌지며 교만과 거짓된 풍요로 비대해져가고 있는 것을 막아내지 못했다. 역사의 무수한 사건을 외면했으며 그러한 일들을 방치하는 것이 한 개인의 실존적 인생관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신앙 선조들은 그렇지 않았다. 총·칼 앞에서 권력 앞에서 굴하지 않았다.
권세 앞에서 체념과 비굴과 기회주의가 길러지는 것은 한 개인의 영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일까? 부정의한 일을 보고 침묵하며, 자신의 개인적 복락에만 관심을 쏟는 존재의 영성은 건전한 것일까?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사회적 양극화로 고통 받는 이들의 절규가 터져 나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일에 귀를 막고 있는 이들의 영성은 무엇을 위한 영성일까? 이런 마음과 영성을 지닌 이들이 우리 사회의 지도층에 있게 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 역사에 무지한 채로 역사의 죄과를 되풀이하는 이의 영성은 존경받을 만한 것인가? 민족 분단의 적대적 현실을 보고, 어떻게 민족적 화해와 협력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갖지 못하는 영성은 제 아무리 묵상의 길이가 깊고, 교회생활이 충실하다 해도 이 민족의 미래를 위해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한 영성은 하나님 나라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기독교 신앙의 영성은 먼저 인간과 우주 만물의 아픔에 눈뜨는 일에서 시작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하는 일이 우리가 목표하는 영성이라면, 그분의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았던 그 절절한 마음을 갖는 것이 제대로 된 영성의 기초이다. 오늘날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는 현실 앞에서는, 인간의 고통뿐 아니라 우주 만물의 절규를 듣는 것도 요구된다. “이 아픔을 어떻게 치유하고 여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까” 하고 하나님께 묻는 과정,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이며 곧 영성 훈련의 절차이다.
생명의 기력을 받아 이 아픔에 다가가는 능력이 영적 성장이라면, 우리는 아픔에 민감하고 그 아픔을 낫게 하는 사랑의 마음을 풍성하게 갖는 것이야말로 영성의 전제인 것을 확인하게 된다. 아파하는 존재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영은 없다. 자신을 남보다 강하게 할 능력을 사모하고 과시하려는 자에게 주어지는 영은 단연코 사탄의 영이다. 우리 교회 안에 이러한 모습은 없는지 돌아볼 일이다. “모든 영이 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믿지 말라”(요한일서 4:1)고 한 사도 요한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양의 탈을 쓴 이리의 영이 신앙인들을 혹세무민하고 있다.
강자를 추종하는 세상적 영성
역사의 희생자들, 현실의 패배자들이 내지르는 통한의 절규에 귀가 멀어있다면 그의 영성은 강자를 추종하는 세상적 영성이며 하나님의 뜻에 합할 수 없다. 온유하고 겸손하며 낮은 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버려진 자들을 향하여 다가가신 예수님의 동역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 교회가 일찍이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을 추구하면서, 신앙 선배들의 유산과 전통을 이어받으며 그 동역자가 되려는 노력을 꾸준히 쌓아왔다면 한국교회의 사회적 영향력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됐다. 이 세상을 향해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실체를 구현하라는, 그래서 그 어떤 위협 앞에서도 '십자가의 능력'을 믿고 힘있게 나가는 모습을 보이는데 실패하고 만 것이다.
개인적 고뇌가 어떤 사회적, 역사적 현실과 관련이 있는가
그런데, 한 가지 염두에 둘 것이 있다. 역사와 현실, 그리고 개인적 영성의 관계를 다져나가는 과정에서 자칫 범하게 되는 오류에 관해서이다. 역사와 현실을 말한다고 하면서 이것이 또 다시 새로운 관념주의와 추상주의에 빠지게 되는 함정이 있다. 생생한 역사와 현실보다는, 자신의 역사관과 현실 해석이 앞서서 생동하는 현실과 역사의 숨결을 가로막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역사와 현실 속에 들어있는 개인적 실존의 고뇌를 드러내기보다는 당위론적 주장에 치우쳐 마음 깊이 다가가는 영성의 섬세함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역사와 현실이라는 거창한 구도 속에 파묻히는 인간의 실존 자체를 주목하는 일이 필요하고 또 그것이 어떻게 역사와 현실이라는 규모가 큰 장과 관련을 맺고 있는가를 밝히는 일이 요구되는데 그에 필요한 접근 능력이 우리에게는 아직 부족하다. 그래서 주장은 난무한데 감동은 없고, 이성의 설득은 충만한데 영적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으며, 당위론적 결단은 있으나 신앙적 확신은 없는 상태를 낳게 될 수 있다. 이것은 역사와 현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상황에서 흔히 빠지기 쉬운 대목이라는 점에서 각별한 주의를 요구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 것인가? 무엇보다도 구체적인 개인적 고뇌의 현장에 대한 체험과 이해가 풍부해져야 한다. 그래서 그 생생한 아픔과 갈망의 뿌리를 깊숙이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아픔에 다가가는 언어 또한 생경하지 말아야 하며, 구체적인 생동감과 언어적 탄력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언어적 탄력성이라는 것은 그 아픔을 표현하고 이해하는 방식이 다채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고뇌는 그토록 다면적 차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 개인적 고뇌가 어떤 사회적, 역사적 현실과 관련이 있는가를 보도록 해야 한다. 자기만의 문제라고 여겼을 때는 힘들지만, 그와 유사한 처지에 놓여 있는 이들의 증언과 간증, 그리고 현실을 듣고 보는 일은 점차 안목을 넓혀 가는 기초가 된다. 그래서 세상의 작은 자들이 하나가 되어 서로 사랑하고 아끼면서 죽음의 권세가 지배하는 역사와 현실에 도전함을 ‘새로운 생명 공동체’가 탄생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겨자씨가 자라나 큰 겨자나무가 되어 공중에 유리하는 새들의 보금자리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로써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원리와 방향이 그 삶의 기초를 잡아가는 그런 공동체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생명 공동체의 존재와 성장이 있음으로 해서 인간사의 영성이 바로 세워지고,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자라나며 하나님 나라의 실체가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일체의 모순은 역사와 현실에 대하여 바로 마주하지 않는 기독교 영성에서 비롯되는 것도 적지 않다. 역사가 잘못 갈 때, 현실이 모순을 그대로 지속하려 들 때, 그것이 한 개인의 실존에 어떤 고통을 주고 있는지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세월호 참사와 대량 실업과 가족 공동체의 파괴에서 그대로 목격하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개인주의적 영성의 이기심에서 벗어나 신앙 선배들이 보여준 실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생명 공동체의 능력을 길러나가야 한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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